- 분노에서 무덤덤으로, 다시 애정으로

지난해 총회 직전부터 일부 인사들에 의해 <성결인신문>을 발간하려는 움직임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오해, 또는 무지, 그리고 왜곡이 포함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언급이나 반응을 가능한 자제하였습니다. 총회의 중책을 맡았던 분들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라 믿음(?)이 있었기도 했지만 후배 된 입장, 그리고 그 분들을 섬겼던 실무자 입장에서 침묵이 예의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월 전국교회에 A4 3장의 문서를 보내며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더니 <성결인신문> 발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깨어진 것 때문이 아니라 그분들이 자신들의 말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마치 사실인양 주장하는 단계를 넘어서 성결인을 왜곡의 구덩이에 빠뜨리려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기회를 만난 듯 이를 활용하는 듯한 교단 내 일부 인사의 행태에도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중심을 잡고 나가야 할 총회본부조차 그동안 한국성결신문이 교단 내에서 한 역할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줄때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노를 삭히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 <다툼 없는 삶>(조이스 마이어) 등의 책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실무자 입장에서는 지금 발행하고 있는 한국성결신문을 더 잘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말하기도 더디하고 성내기도 더디하라 ’, ‘다툼의 영이 지배하지 말게 하소서’ 등을 수없이 대뇌었다. 결국 분노가 얼마만큼 어리석은 것인지, 나를 상하게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고 불쌍한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조차도 나의 어줍잖은 아집의 표현임에 후회하며 감정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젊은 나이고 인간인지라 ‘누가 어느 곳에서 무슨 말을 했다더라’는 말이 들리고 발행된 <성결인신문>의 주장을 접할 때는 간혹 분노의 감정을 숨기기 어렵기도 합니다. 이것도 많이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감정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신문을 받아볼 독자, 바로 성결교인들입니다. 그동안 한국성결신문이 교단 안팎의 갈등이나 교계의 부정부패 관련 소식에 보도 자제를 하여 축소보도의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거짓된 것을 사실이라고 왜곡하거나 거짓 주장을 사실로 호도할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결인신문>은 <한국성결신문>과 교단과 관련해 사실을 고의적으로 비틀고 거짓된 것을 사실인양 보도하고 있어 이를 보는 성결교인들이 혼란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영향은 없으리라 여기지만 <한국성결신문>에 관한 잘못된 내용만은 바로 잡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번에 인터넷을 통해 이번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온 <성결인신문> 창간 멤버들의 전국교회 배포 문서와 <성결인신문> 지면에서 제기한 내용을 기초로 지금까지 제기된 내용에 대해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글은 인터넷 게재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결인신문>은 본지 3면에 그리 크게 보도되지 않은 보도내용(2단 기사)를 가지고 감정에 사로잡힌 듯 신문 1면과 3면 한 면 전체를 털어 글을 썼습니다만 <한국성결신문>은 그렇게 해서도 안되고 가능한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성결신문> 지면은 기자들의 것이 아니며 독자의 것이며 전국 성결가족들의 공적인 이해를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성결신문은 1999년 10월 홈페이지 개설 후 지난해 3월 홈페이지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바 있습니다. 이 개편 후 홈페이지 이용자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교단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성도들은 신문에 비해 홈페이지를 구석구석 까지 살피지 않을 것이란 점도 고려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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