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한 조종남 박사
서울신대 부천 이전 주도하고
학장 5번이나 맡아 발전 기틀
웨슬리신학 이론 정립하고
한국교회 영적 갱신도 기대
국제 로잔운동 산증인 역할
최근까지도 학술모임 참석

“웨슬리안 신학의 거목”
"국제 로잔 운동의 산 증인"
"신학 교육의 기틀을 세운 한국 목회자들의 큰 스승"

지난 8월 20일 하나님 곁으로 간 고 조종남 박사(장충단교회 명예)를 부르는 말이다.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저명한 웨슬리 학자로 널리 알려진 조종남 박사는 국내 최초로 웨슬리 신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1966년 에모리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미국 아주사 퍼시픽대학교에서 인문학 박사학위, 애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웨슬리 신학의 전통을 한국에 정립하고 주창함으로써 우리 교단이 칼뱅주의 장로교와 함께 웨슬리 신학의 주류로 설 수 있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웨슬리 교단에서는 조종남 박사가 칼뱅주의와 절대주권 예정론 신학이 판치는 한국 교회에 웨슬리 신학이 신학의 양대산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신학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종남 박사의 대표 저서인 요한 웨슬레의 신학』은 웨슬리 신학의 교과서로 불린다. 그 외에도 복음과 문화』,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뿌리』, 요한웨슬레 설교선집』, 웨슬리의 갱신 운동과 한국교회』, 존 웨슬리 설교전집』, 우리가 가야 할 길』 등 20여 권이 넘는 저서와 역서를 남겼고, 논문, 강연, 수상 등을 통해 한국 웨슬리 신학을 정립하는데 공헌했다. 

특히 아흔이 넘은 최근까지도 저술 활동을 하고 웨슬리신학연구소의 설교강독모임과 워크숍에 참석해 강의하는 등 학문 탐구의 열정을 잘 보여주었다.

일평생 교육자의 자리를 떠난 적 없었던 조 박사는 1958년 서울신학교 전임강사로 시작해 교수가 되고 1968년 학장으로 취임했다. 충정로의 아현교회 지하 강의실에서 부천으로 서울신대를 이전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서울신대 제3, 4, 5, 6대와 9대 학장을 지내며 ‘장기 독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서울신대의 신학적 전통과 미래 설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외에도 전국신학대학 협의회장, 명지대 교수, 교목실장, 2부 대학 학장, 인문사회대학장을 지낸 후 명지대 석좌교수와 서울신대 명예총장으로 끝까지 교단을 지킨 진정한 스승이었다.

이러한 그가 한국 복음주의의 별로 불린 것은, 50년 전 스위스에서 1차 로잔 대회가 열릴 때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 때부터다. 조종남 박사는 “온 세계에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라며 로잔 정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971~1983년 OMS 국제선교회 이사, 1977~82년 세계 복음화 국제협의회 회장, 1987~2002년 세계 복음화 아시아 로잔위원회 회장, 1992~94년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회장을 맡았다.

조 박사의 추천으로 국제 로잔 동아시아 총무로 선임된 최형근 교수(서울신대)는 “조종남 박사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으로 견고함을 늘 지탱하셨던 로잔 운동의 산증인이었다”며 “한국로잔위원회를 세우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국제 로잔뿐 아니라 아시아 로잔, 한국 로잔 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던 조종남 박사가 로잔 운동에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잘 아는 최 교수는 “내년 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해 중요한 기회라며 기대하셨으나 이를 보지 못하고 떠나셨다”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교계에서도 대한성서공회 회장, 사회복지재단 길보른재단 이사와 대표이사 등을 맡아 사회적인 어른의 역할을 다했다. 조 박사는 웨슬리 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걸어온 길은 신학자로서, 교육자로서의 위대한 발자취였다.

수많은 조문객들은 “한국 교회의 큰 스승을 잃었다”며 “그분이 남긴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유산을 잘 이어받아 교단과 한국 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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