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무구한 신앙, 거룩한 길이 되다
군위성결교회 독특한 예배당
남녀 출입 구별해 현관 2개
일제 때 폐쇄 후 전국 최초 재건

▲ 군위교회는 첫번째로 예배당을 제외한 모든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1937년 지어진 두번째 예배당은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순후질박한 군위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한국 3대 종교의 영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 군위읍 용대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수환 추기경, 일제가 폐쇄하고 재산을 처분해 버린 성결교회를 재건한 군위사람 천세광 의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군위는 거룩한 사람들의 고향이다.

군위버스터미널에서 옛 군위고등학교 터로 가면 숭덕관이 나온다. 숭덕관에서는 《三國遺事》 여러 가지 판본을 볼 수 있고 판각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숭덕관 뒷길을 돌아가면 군위성당이다.

군위성당 후관을 리모델링한 커피숍 하늘채는 걷기여행객이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군위성당을 나와서 호젓한 벽화거리를 지나면 바로 군위성결교회로 이어진다. 군위성결교회는 첫 번째로 지은 한옥예배당을 제외한 모든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1937년 완공한 두 번째 예배당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다. 군위 거룩한 길을 걷는다.

군위성결교회 문화재 예배당
1935년 3월 군위성결교회 제7대 교역자로 이종익 목사가 부임한다. 군위성결교회로 부임한 첫 목사다.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부임한 것이다. 강시영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한다. 1,000원이 넘는 건축헌금을 작정한다. 이종익 목사는 전국에 있는 성결교회와 일본에 개척한 성결교회를 순방하면서 건축헌금을 모금한다. 1937년 6월 1일 한옥예배당을 철거하기 시작하는데 강 목사가 철거 도중 낙상사고로 순직한다.

이후 군위성결교회 성도들은 군위 출신 김영수 전도사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한다. 그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했지만 시각장애인이어서 교회를 담임하지 못한 채 고향교회에 머물러 있었다. 김영수 전도사는 마산성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임도오 목사를 초청한다. 삼천포성결교회를 설계하고 완공한 분이다. 임도오 목사는 삼천포성결교회 예배당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군위성결교회 예배당을 지었다. 직접 설계를 하고 시공을 감독한다. 7월에 건축을 시작하여 8월에 완공한다.

삼천포성결교회와 군위성결교회 예배당은 현관 두 개를 툭 튀어나온 포치(porch)로 만들었다. 삼천포성결교회는 포치 위에도 십자가를 세웠는데, 군위성결교회는 용마루에만 세웠다. 삼천포성결교회는 그냥 직사각형 창문을 달았는데, 군위성결교회는 직사각형 창문을 첨두형 아치창으로 마감했다. 삼천포성결교회는 전문 유리창이 한 개인데, 군위성결교회는 세 개다. 이처럼 두 예배당은 차이점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같은 예배당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임도오 목사는 왜 이렇게 설계했을까? 현관이 두 개 있는 건물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솟을대문을 현관으로 세운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현관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다. 주로 서원이나 사묘에 솟을대문을 세운다. 여성은 이런 곳에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성별차이를 두지 않았다. 다만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을 지켰다.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나간다. 중앙문은 왕이나 성현만 출입할 수 있다.

두 개인 경우는 정면 현관과 측면 현관을 분리한 경우다. 남·녀 출입문을 달리함으로써 엄격한 유교윤리를 고수하기 위한 것이다. 남성은 정면 현관을 사용하고 여성은 측면 현관을 사용한다. 정면 현관은 크다. 측면 현관은 작다.

물론 예외도 있다. 일부 사대부가에서는 정면에 현관을 나란히 두기도 했다.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기풍을 지니고 있는 집안의 경우에 그러하다. 전형적인 사례는 강릉 경포호반에 위치한 배다리집, 선교장(船橋莊)이다.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이다. 정면에 두 개 현관이 나란히 있다. 남성은 왼쪽 문을 사용하고 여성은 오른쪽 문을 사용한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내외담을 설치해서 남성의 시선을 차단한다. 차별하고자 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강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의 높이가 다르다. 남성 출입문은 솟을대문으로 하였고, 여성 출입문은 평대문으로 했다.

임도오 목사가 예배당 현관을 두 개로 설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엄격한 유교윤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다. 일곱 살이 되면 그때부터 한 자리에 앉아서도 안 된다. 남자는 양이다. 그러나 그 속은 음이다. 반대로 여자는 음이다. 그러나 그 속은 양이다. 남자는 속이 음이기 때문에 음을 따라야 하고, 여자는 속이 양이기 때문에 양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성적으로 성숙한다. 땅은 음이고 하늘은 양이다. 왼쪽은 음이고 오른쪽은 양이다. 짝수는 음의 수이고, 홀수는 양의 수다.

성적으로 성장하려면 내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남성은 양이지만 속은 음이므로 음의 수, 짝수를 따라야 한다. 여성은 음이지만 속은 양이므로 양의 수, 홀수를 따라야 한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 9와 10은 양과 음이 최대에 이른 노양과 노음이다. 즉,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음과 양 최고 숫자는 8과 7이다. 여성은 양의 이치를 따라야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7의 지배를 받는다. 남녀7세부동석은 이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현관을 두 개 만들었다. 남자는 음의 이치를 따라야 하므로 왼쪽으로 출입해야 한다. 양의 이치를 따라야 하는 여자는 오른쪽으로 출입하고 남자가 왼쪽으로 출입하게 했다.  이처럼 예배당이 특별했지만 일제는 1943년 모든 성결교회를 폐쇄하고, 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을 군농회에 2360원을 받고 팔아버린다.

이후 1945년 옥중에서 광복을 맞은 군위사람 천세광 목사가 9월 5일 군위성결교회를 재건한다. 전국성결교회 중 최초다. 11월 19일 성결교회 재흥총회 의장으로 선출된다. 성결교회의 수장이 된 천세광 목사는 일제가 폐쇄하고 처분해버린 200여 성결교회를 재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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