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서씨 포죽도’ 품은 숭덕관
김수환 추기경 생가·전시관도 볼거리

▲ 숭덕관
연녀서씨포죽도의 숭덕관

1283년 78세 된 일연은 95세 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낙향한다. 군위 인각사다. 이듬 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인각사 뒷산에서 보이는 곳에 어머니를 모신다.《歷代年表》를 바탕으로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한다. 군위 인각사에서 1289년 89세를 일기로 입적한다. 이러한 연유로 군위 숭덕관에 삼국유사와 판각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덕관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다. 지난 2012년 10월 21일 ‘TV쇼 진품명품’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군위군 효령면에 사는 도재홍 씨가 출품한 그림이다.

무려 10억이나 되는 감정가를 받았다. ‘대동여지도 채색본’(25억 원)·‘석천한유도’(15억 원)·‘청자상감모란문장구’(12억 원)·‘낙서장만영정’(12억 원) 등에 이어서 역대 다섯 번째로 높은 감정가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대나무를 부여잡고 있다. 양 옆으로 흰 대나무가 여러 대 솟았다. 그림 속 여인은 군위군 효령면 입향조 성주 도씨 운봉(都雲峯)에게 시집 온 낭장(郎將, 정6품 무관) 서사달의 딸 달성서씨(達城徐氏)다.

1438년 경상도 감사가 군위사람 도운봉의 아내 이야기를 세종에게 아뢴다. “군위 사람 도운봉이 그 후원(後園)에 대[竹]를 심고는 매일 이를 완상하며 즐기다가 운봉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서씨는 나이가 28세였다는데, 조석으로 그 후원으로 가서 대나무를 쓸어안고는 애모하기를 항상 처음 죽었을 때와 같이 하여, 17년간 계속하던 중 하루는 흰 대나무가 그 후원에 돋아났다고 합니다. ······ 서씨 집 뒤에 대가 난 것도 한 상질(常質)의 변이(變異)이오니, 그의 높은 정절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권장하게 하옵소서.”

▲ 열녀서씨포죽도
세종은 경상도 감사가 아뢴대로 마을에 정문을 세운다. 흰 대나무 그림을 그려오라 명한다. ‘포죽도’를 보고는 직접 시를 지어 내린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림은 불에 타버린다. 지금 성주 도씨 문중에서 대대로 전하고 있는 ‘열녀서씨포죽도’는 정조 19년 1795년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1756~1813)가 다시 그린 그림이다. 장수도에서 찰방으로 일할 때(1793~1795)부터 화산관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화산은 군위에 있는 산이다. 이명기는 도화서 화원으로 인물화와 채색 나비를 잘 그렸다. 이듬해 정조 임금께서 이명기를 불러서 어진을 그리게 했다. 세손과 함께 직접 나와서 어진 그리는 것을 보고는 돌아서서 웃곤 했다. 얼굴과 수염이 똑 같게 되어갔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최고 감식안은 누가 뭐래도 정조 임금이다. 정조 임금이 두 번씩이나 어진을 그리게 한 화원이 이명기다. 이명기는 이처럼 뛰어난 화원이다.

이명기가 어진을 그리기 한 해 전 찰방으로 있을 때 성주 도씨 청송당공파 군위 성동 문중도필구로부터 부탁을 받고 ‘열녀서씨포죽도’를 다시 그렸다. 3단으로 구성한 그림 하단 우측에 재실(齋室)을 그린다. 빈속 앞에 상주가 짚던 대나무 지팡이에 잎이 돋았다. 열녀서씨가 숲에서 대나무를 부여잡고 있는 장면을 중단에 그린다.

상단에는 안개 낀 산을 그린다. 멀리 보이는 둥근 산에 숲을 미점으로 표현한 것은 겸재 정선의 영향이다. 남종화, 즉 문인화 기법이다. 재실 뒤 무성한 숲과 중단 정교한 대나무 숲은 단원 김홍도의 필치다. 도화서 화원 기교다. 전문 화가가 문인화를 계승·정착해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

▲ 김수환 추기경 생가
김수환 추기경 생가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군위읍 용대리에 용대교우촌이 생긴다. 옹기굴이 있는 곳이어서 생계를 꾸려 갈 수도 있었다. 순후질박한 군위사람들 품성 덕분에 숨어살기도 좋았다. 1917년 군위군 용대리로 이사 온 이윤석 베드로가 용대공소를 설립한다. 이윤석 베드로는 김수환 추기경의 큰 누나 김계분 데레사의 남편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용대리로 이사 온 것은 네 살 때인 1926년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용대공소로 사용했던 추기경의 초가삼간 집을 김수환 추기경 생가로 지정한다. 생가·전시관 등 성역화 작업을 마쳤다.

2009년 2월 16일 폐렴 증세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문병 온 정진석 추기경과 염수정 주교 등 서울대교구 주교단과 명동성당 주임 박몬시뇰 신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 6시 12분 87세를 일기로 운명한다. 명동성당 십자가 아래 추기경 휘장과 검은 리본을 드리운다. 다음 날 시각장애인 두 명이 각막이식수술을 받고 빛을 되찾는다.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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