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나(有田後先)라는 일본군 중위가 제암리에서 그 곳 교인들을 예배당에 가두고 총을 쏘고 칼을 휘드르며 불을 질렀다. 예배당은 전소되고 갇혔던 사람들은 모두 산채로 불에 타서 죽었다. 갖 시집온 새댁이 불에 타서 죽는 남편 때문에 울며 일본 경찰에게 매어달리자 일본 경찰은 차고 있던 칼로 새댁의 목을 내리쳤다. 새댁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 히틀러의 나치 지배 아래서  독일인이면서도 과감하게 ‘아니오’를 부르짖은 두 명의 목사가 있었다. 디트리히 본훼퍼(D. Bonhoeff er)와 마르틴 니묄러(M. Niem쉕l er). 본훼퍼는 종전을 앞두고 사형 당했고 니묄러는 종전 후 석방되어 독일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웠다. 본훼퍼와 니묄러의 고난,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었다.

▨… 한국교회가 제암리를 기억하듯, 독일교회가 본훼퍼를 가슴에 담듯, 우리 성결교단은 문준경을 추모하려고 한다. 그녀를 추모하여 문준경 순교기념관을 지으려 한다. 우리 교단의 교세와 힘으로는 벅차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분들의 열심이 있으므로 기필코 열매는 맺을 것이다.

▨… 추모는 죽은 이를 생각하고 그리워함이다. 문준경을 추모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순교기념관을 지을 이유는 사라진다. 순교지는 추모의 대상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어야만 한다. 니묄러는 본훼퍼처럼 사형당하는 대신 종전 이후 독일 통일과 평화를 위해 본훼퍼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웠다. 산 자의 의무를 감당한 것이다.

▨… 우리는 본훼퍼도 존경하지만 니묄러도 있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는 니묄러가 더 절실한지도 모른다. 1945년에 쓴 니묄러의 ‘고백’을 간추린다. “맨 처음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다음엔 유대인을, 다음엔 가톨릭 교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도 변호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도, 유대인도, 가톨릭 교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그 무렵 나를 변호해줄 사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삼 니묄러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