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 행전>을 읽고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왜 하필 <바나바 행전>으로 정했을까가 처음에 좀 궁금했다. ‘행전(行傳)’은 신약 사도행전의 바울과 베드로의 사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통의 이야기에 붙이는 이름이다. 또 몇 년 전 아는 집사님을 비롯해서 몇 명의 평신도가 쓴 <일곱 집사 전도행전>이란 책도 그들이 전도하면서 겪은 애환들을 정리해 놓은 글이었다.
이 ‘행전’들에서의 공통점은 어렵고 힘든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들은 주님의 동행을 믿고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이강천 목사의 신앙 간증기인 이 글에 ‘행전’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기발한, 아니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가감 없는 솔직함과 신앙의 진실성>
그는 이 글이 어떤 장르에 속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이건 분명 수필의 범주에 속하는 글이다. 어떤 영역이건 개인의 인생 역정을 가감 없이 붓 가는 대로 써내려 간 글을 수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감 없이’와 ‘붓 가는 대로’에 강조점이 두어져야 할 터인데, 이강천 목사의 글은 여기에서 단연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 왜냐하면 인생의 솔직성에다 신앙의 진실성까지 합쳐져 있어 ‘가감이 없기’ 때문이고, 문단까지 무시하고 문장 중심으로 글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붓 가는 대로’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젊은이들을 겨냥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보잘것 없는 한 목회자의 수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시대에 고고하게 서 있는 한 영성의 대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천 목사는 건강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체력이 약한 사람이고 또 어렵지만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며 지적 수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목회자다. 하지만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다.

<고고한 영성 앞의 위축감>
우리는 가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고 재력가를 만날 때도 또 대중이 선망하는 연예인들을 만날 때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조금은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이강천 목사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왜인가? 그의 고고한 영성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영성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특별히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이 있다. 그가 하나님과 영적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그것이다. 또 중요한 사역 뒤의 감동을 운문으로 덧붙인 시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며 또 고비 고비마다 놓치지 않고 감동과 은혜를 시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시인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그렇다고 내용을 간파하지 않는 건성의 독서는 절대 아니었다. 언뜻 ‘성령이 함께 하시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모르긴 해도 이강천 목사의 대쪽 같은 신앙심에다 문학적 재미까지 그리고 인간의 진솔성이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빠져들게 한 것 같다.

<앞으로의 사역, 그리고 후속편>
이강천 목사도 책에서 이야기했듯이 ‘인생은 60부터’다. 나는 이 책이 이강천 목사의 완결된 신앙 간증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나바 행전>은 아무 에필로그 없이 붓을 놓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아마 그는 지금까지 해 온 사역보다 앞으로의 사역이 더 소중하게 주님의 일에 쓰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붓을 뚝 떨어뜨린 것은 그의 남은 사역을 기대해도 좋다는 선언 같이 받아들여져 도리어 후속 편을 고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 좋다. 마치 재미있는 연속극이 더 많은 시청자를 모으기 위해 클라이막스에서 막을 내리듯이 말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