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네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든 용서하여 주라고 말하지만 내게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단 한번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우리의 심성을 꿰뚫어 보신 것일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불가능의 영역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 내게 가하지는 위해를 아직은 견딜만하므로 참는 것과 내게 죄를 가했음에도 용서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참는 것은 언젠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폭발할 수도 있지만 용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손해와 피해를 그대로 감싸 안는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는 개인 차원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집단의 문제화하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 인도의 보팔에서 유니언 카바이드 사의 화학 약품 누출로 약 2천 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었다. 수습책이 난감하기만 했었던 유니언 카바이드는 궁여지책을 짜냈다. 테레사 수녀의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보내고 테레사 수녀를 대동하여 사고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기자들이 물었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께 무슨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까? 테레사 수녀의 대답은 그저 용서하고 용서하는 것 뿐입니다 였다.

▨… 이런 식의 용서도 일흔번씩 일곱 번의 용서라는 범주에 포함되어질 수 있는 것일까.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일흔번씩 일곱 번과는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모독되어지는 용서는, 정의가 훼손되어지는 용서는 일흔번씩 일곱 번의 범주에는 포함될 수 없을 것이다.

▨… 장로제적 문제는 지난 회기 때의 문제이므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결정은 법적으론 문제없더라도 테레사 수녀 대동 식의 궁여지책이다. 그 결정엔 정의도 없고 용서도 없다. ‘일흔번씩 일곱 번’을 안다면, 중생, 성결을 말한다면 서로가 끌어안을 수 있는 화합의 장이 있어야 한다.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발상은 유니언 카바이드의 잔꾀만도 못하다. 성결인다운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는 것은 아직도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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