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되던 해 헌신과 첫 목회지 길산교회

1945년 해방 후, 그는 군청근무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데 고향 친구로 장로교에 다니는 임영재가 찾아와서 함께 신학교에 가자고 권면하기에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고 백승하에게도 권면하여 함께 1945년 11월에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가 된 것을 해방을 맞은 그해 말에 재건한 신학교여서 사명자들이 많이 모였다.

이건 교장, 박현명, 김유연, 한성과, 최석모 목사 등이 교수진이었고, 후에 총회장을 지낸 정진경 목사와 정승일 목사, 합동측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박명수 목사, 감리교 감독을 지낸 최기석 목사, 이준용 감독, 미국 동양선교교회 임동선 목사 등과 함께 공부했다.

그는 1949년 6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첫 목회지인 충남 서천 길산교회에 부임했다. 해방 직후 개척되어 3년쯤 된 교회였는데 폐쇄 직전이었다. 장년 6~7명, 어린이가 20여 명 되었는데, 일본인 정미소 창고건물을 그냥 예배당으로 사용했기에 창문도 없어 캄캄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아서 굶기를 밥 먹듯 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목회를 했다. 어느 날에는 저녁을 못 먹였는데도 울지 않고 졸다가 힘없이 잠드는 자식들을 보면서 아버지로서 마음이 아팠으나 목회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만 했다.

부임 후 1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다. 모두들 피난 가느라 법석인데도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교회를 지켰다. 목사들도 집사들도 직책을 숨기고 성경찬송을 숨기던 시절, 그는 가방에 성경과 찬송을 가지고 다니며 검문에 걸리면 “나는 전도사다, 예배드리러 간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에게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

“주님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죽을 때는 전도사로,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는 일사각오로 나가니, 치안대원에게 불려가고 또 묶여 끌려가기도 했지만 매 한 대도 안 맞았습니다. 당시 공산치하는 참 무서웠지요. 잡혀가면 병신 되어 나오고, 소식이 끊기고 하니 하루를 사는 것이 10년을 사는 것 같고, 언제 잡혀갈지 몰라 조마조마했어요. 지척이 천리라고 앞 동네가 천리였고, 가족 간에도 무슨 말을 마음 놓고 못했어요.” 최 목사의 당시 간증이었다.

전쟁을 거치며 한 3년, 영혼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각오로 일하니 300명 정도 모였다. 이성봉 목사를 강사로 한 부흥회에서 헌금과 헌물이 많이 나와 빚 하나 없이 교회당과 사택을 신축했다. 이성봉 목사 자서전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155쪽에 실린 글이다.

“오랫동안 침체 중이던 길산교회는 최동규 목사의 필사적 기도와 희생적 봉사로 근년에 일약 대부흥, 장·유년 500여 명의 대교회로 쩔쩔 끓었다. 금번 성회는 첫 시간부터 경이적인 역사로 농촌교회에서 보기 드문 대성황이요, 구 예배당을 헐고 천막에서 인산인해로 구도자 165명, 헌금 100여 만 환이니 농촌에서 대 이적 아닌가? 이름대로 대길의 성산이 되리라.”

1960년경 여름, 그가 주최한 대천 성주산집회에 현성초, 차남진, 양도천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는데 5~600명 정도 모였다. 이에 힘을 얻어 그해 9월, 강계헌 목사와 함께 계룡산 양정기도원에서 부산 시온교회의 정영문 목사와 김형태 목사를 강사로 사명자성회를 열었다.

이 성회에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최 목사도 큰 은혜를 체험하므로, 길산교회는 더욱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는 4개월간 강사가 되어 새벽과 저녁으로 집회를 계속했는데, 그 결과 장년이 재적 700여 명, 매 주일마다 500여 명이 출석했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한 때 1300여 명이 되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다. 주일마다 몰려오는 사람들을 감당할 길이 없었고, 결국 직원회에서 새 신자를 그만 받기로 결의할 정도였다.(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