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머뭇 하려느냐

▲ 이성훈 목사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선지자들과의 대결 중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를 택하든지’ 혹은 ‘바알을 택하든지’ 하라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서서 중도적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처세술일지 모르나, 결코 신앙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은 삶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양쪽을 저울질 하는 이유는 기회를 잘 살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이 바알 우상을 섬김으로써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등하며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리야는 “둘 사이에서 어느 때까지 머뭇 머뭇하려느냐”며 책망하고 그들을 질타합니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그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뭇 머뭇 하려느냐’는 히브리어의 ‘파사흐’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본래 ‘발을 저는 형태’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말이 출애굽기에서는 ‘넘어가다’라는 뜻으로 쓰여 유월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사이(히.스이핌)’란 본래 ‘틈’ 혹은 ‘가지’를 의미합니다. 즉 두 개의 틈이나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에서 이쪽저쪽 왔다갔다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상케 하는 용어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면 당장 손해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논리를 따르자니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절름거림 즉 ‘파사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절름거리는 모습이 나름대로는 지혜로운 처신 같으나, 신앙인이 절대 걸어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습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모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엘리야와 대결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불러서 누가 불로 응답하는가에 따라서 참 신을 밝히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며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어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성경은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사용된 ‘뛰놀더라’는 표현이 바로 ‘파사흐’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머뭇 머뭇 하려느냐’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지혜롭다고 여기는 처신을 이방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신 앞에서 ‘절뚝 절뚝 거리는 모습’과 동일시 하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고 아세라와 바알 신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을,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좇으라는 엘리야의 외침은 가치관의 혼란함이 가중되어 영적으로 절름거리는 이 시대가 들어야 할 시대적 음성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주를 따르며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그러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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