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숭례문의 참담한 형해를 보는 한 민족의 억장이 무너진다. 200억 300억을 들여 복원한다 해도 610년 전 조상의 얼이 담긴 숭례문의 문화적 가치가 되살아날 수 없다. 숭례문의 참화에서 우리 기독교문화에 대한 교회의 각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소중한 찬송가 제목을 버리고 가사 첫 줄을 제목으로 내세웠다. ‘은혜의 소낙비’가 ‘빈들의 마른풀 같이’로, ‘일하러 가세’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으로, ‘하늘의 영광’이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로, ‘축복’이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로 해놓았다. ‘애국가’의 제목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바꿔놓은 꼴이다.

‘은혜의 소낙비’를 ‘빈들의 마른풀’로 ‘하늘의 영광’을 ‘태산을 넘는’ 것으로, ‘축복’을 ‘세상풍파’로 찬송주제의 혼란을 일으킨다. 찬송은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성경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하늘로부터의 계시라면 찬송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높으신 위엄을 찬양하는 응답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편의주의와 조급증에 길들여진 한국교회가 찬송가를 빨리 찾도록 하기위해 가사 첫줄을 제목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교단에서 파송된 찬송가위원들이 가사제목 복원에 책임지고 나서야한다.

교회이름을 바꾸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50년 60년 70년을 이어온 교회마저 바꿔치워 과거와 단절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교회이름에는 창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신 선진들의 얼이 배어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신앙을 위해 선한 싸움을 했고, 그들의 성결한 삶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서있고, 그들이 충성되게 살면서 교회를 발전시켜왔음을 기억해야한다. 역사의 전통이나 명맥이 소중한 까닭은 그것이 현재의 본보기이자 미래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活泉’지는 90년을 바라보는 장구한 명맥을 이어오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요즘 活泉제호가 곤두박질쳐져 있다. 어느 잡지이건 표지의 글꼴은 고정시켜 두는 것이 상례다. 제호와 글꼴은 그 잡지의 얼굴로서 잡지의 성격과 배경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함부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유구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한글가로쓰기로 바꿀 때에도 한자(漢字)제호의 글꼴을 바꾸지 않은 것은 근본은 불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活泉제호의 글꼴이 수시로 변할뿐더러 표지사진(그림)을 부각시킨다는 생각으로 제호를 자빠뜨려놓았다. 또한 제호를 ‘살리는 샘’으로 바꿔놓고 그 밑에 아주 작게 한글로 ‘활천’이라고 부제처럼 달아놓았다. 하늘아래 둘도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다. 책꽂이에 꽂아놓으면 活泉제호가 거꾸로 처박히는 수난을 당해 안타깝다. 그림은 어디까지나 제호를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불과하고 노래의 반주에 불과한 것이다. 근본을 모르거나 홀대하거나 흔들어대면 정체성이 흔들리고 정론지의 방향도 좌표도 불안하기 마련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말이다. 옛것을 앎으로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옛것을 배워 가슴속을 따뜻하게 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옛것에 대한 올바른 지식 없이는 오늘의 새로운 사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장차 올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원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후진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자격이 없다. 천지는 변해도 불변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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