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지내니 새로운 봄을 기대하게 된다. 지난 설에는 좋은 덕담들을 많이 주고받았을 것이다. 덕담에서 오간 그대로 한 해가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덕담 보다는 ‘황금률’(Golden Rule)이라는 말을 더 많이 가슴에 담아두기를 소망한다. 황금률은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표현한 것으로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누가복음 6장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뜻한다. 

그 정의를 다시 정리하자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은지 자문해보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 사람들에게 그것을 해주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일견 쉬운 것 같다. 하루 이틀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인류의 역사는 증언해 준다. 그런 청정한 언어와 행동을 일상생활에서 항상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일이 잘못될 때 특히 그렇다.

가까운 사람이 거듭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이번에도 또 나를 힘들게 했다. 그때 어떤 말이 나오게 될까. “언제 좀 나아질래?” 하는 말은 그렇게 심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황금률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잘못을 했더라도 당사자는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는 진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이번에는 일이 잘못됐지만 이 일을 교훈 삼아 용기를 갖고 잘해 보자”는 따뜻한 소리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핀잔이 아니라 바로 그런 진정을 담은 말을 해줄 수 있을 때 황금률은 살아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말은 속에 들어있는 화를 풀어내는 것이어서 말하기도 용이하고, 자극적이어서 쉽게 반응을 끌어낸다. 그러나 상대방이 원하는 겸양의 언어들은 어휘선택을 위해 신중을 기해 생각해야 하지만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그럴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하도록 노력하고 더욱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은 것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있다. 앞의 말은 ‘하라’는 형태의 것이고, 뒤의 말은 ‘하지 말라’는 형태다. 미국의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수동적인 동정과는 달리 공감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앞의 말이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본격적으로 선거의 시기로 접어들면 누군가를 지지하는 쪽과 지지하지 않는 쪽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쉽다. 우리사회에는 상대를 공격하는 말이나 막말이 참으로 많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가 자꾸 거칠어진다. 이럴 때일수록 상황이나 상대에 대해 적극적인 공감을 갖고 청정한 단어로 이루어진 말을 주고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라고 생각된다. 말은 하는 쪽보다 듣는 쪽에서 쉽게 알게 된다.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진정으로 상대를 생각하는지를 듣는 사람은 한순간에 알 수 있다. 새 봄에는 거친 말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기독교인의 향기를 나타내는 말과 행동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에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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