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은 온 몸으로 체험하는 은혜의 수단

▲ 성찬식을 집례하고 있는 오주영 목사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배의 회복이 교회의 회복이라는 의미다. 본지는 이번 주부터 3주간 예배 회복을 위한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주제는 성만찬(오주영 박사), 예배(조기연 박사), 설교(정인교 박사) 순으로 게재될 예정이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제사를 위한 장소이다. 회당은 학습과 모임을 위한 장소이다. 집은 축복과 기도, 의례적 식사를 위한 장소이다. 초기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성찬은 피 흘림이 없는 희생제사였고, 은혜의 수단이었고, 그들의 믿음이 담긴 기도를 드리며 먹는 의례적 식사였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모든 식사는 거룩한 행위였다. 절기 식사는 더더욱 거룩한 행위였다. 

유대인으로 나고 자란 예수께서는 식사 전후에 하는 전통적인 기도의 방식들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식사에 복음을 담기 시작했다. 마가가 전해 준 복음은 듣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과 성례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유대인에게 오병이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나누시기 전에 먼저 빵을 “가져다”, 들어 올리신 후 “감사기도하시고”, “빵을 나누어”, 사람들에게 “주셨다”. 이와 같은 식사의 동작은 마지막 만찬의 순간까지 지속된다. 그래서 부활 이후 엠마오 마을로 가던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예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으나 예수이신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께서 ‘빵을 가지사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눈이 밝아져 예수인 줄 알아보게 된 것이다. 말씀은 마음을 뜨겁게 하고, 성찬은 예수를 보게 한다.

예수님에게 식사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아내기에 가장 정확한 그릇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에도 응하셨으며, 세리와 죄인들의 식사 초대에도 응하셨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차별이 없었다. 주님의 식탁은 환대와 용서의 행위였고, 하나 됨과 개방성의 상징이었다. 공생애의 마지막 정점에 이르러 가는 고난 주간의 성목요일, 예수께서는 다락방에서 성찬을 제정하신다. 빌린 다락방에서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순간에 늘 하시던 대로 빵을 “가지사”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주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말씀하심으로 성찬을 제정하시고, 거행을 명령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성찬은 단지 십자가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회상일 뿐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향연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2:46) 성찬에 참여하면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리고 성찬은 성도의 교제로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 성찬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도가 되고, 행동이 되어 주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집에서 매주 ‘주님의 날’마다 모여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고전 11:23~25)으로 거행됐다.

이 때 사용되던 빵은 성전에 드려졌던 무교병(맛짜)이 아니라 보리빵이었다. 포도주는 주로 적포도주가 사용되었으며, 대개 물로 희석해서 마셨다. 165년 기록된 순교자 저스틴(Justin of Martyr)의 ‘첫 번째 변증’(First Apologetics)에도 이와 같이 물로 희석된 포도주가 성찬을 위한 봉헌물로 드려지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초기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찬’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성찬은 본래 저녁식사였으나 예배가 주일 아침으로 옮겨지면서 지금과 같이 상징적으로 먹는 예전적인 식사(Eucharist)의 형태로 정착, 계승되었다.

그러나 주후 1000년경부터 매주 드려지는 성찬은 사제집단의 전유물이 되었다. 기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였고, 일반 회중에게 성찬은 1년에 단 한번 부활절에 떡만 제공되었다. 회중은 성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얀후스, 마틴 루터, 장 깔뱅 등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성찬의 “빵”과 “잔”을 “모두에게”, “매 주일예배마다” 참여할 수 있도록 성단소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경험이 전무했던 회중들에게 이것은 아직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개혁을 가장 앞서 나갔던 제네바의 당국자들조차 일 년에 4번만 허락했을 뿐이다.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은 16세기~17세기까지 미완의 개혁이 되었다. 

이후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에게서 성찬 개혁의 운동이 다시 살아난다. 웨슬리에게 성찬은 영적인 자양분으로서 어거스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자 은혜의 보이는 수단이었다. 그는 성찬의 신비를 강조하며, 한 주에 서너 번씩 성찬을 집례하였다. 웨슬리는 예수님처럼 교회에서 거리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찬을 거행했다. 산업혁명의 직격탄을 맞은 영국의 탄광촌과 거리에서 웨슬리가 집전하는 성찬은 예수의 성찬과 다름아니었다. 웨슬리의 성찬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고,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예배의 문을 열고 받아들인 예수 정신의 재연이자 재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웨슬리의 성찬에 대한 강조는 독립전쟁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상황과 만나면서 미국 감리교도들에게 충분히 전수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목회자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19세기 미국에서의 성찬은 또 다시 1년에 한 두 차례 방문하는 순회목사에 의해 거행되는 빈약한 예배순서가 되었다. 한국의 성찬은 북미선교사들에게서 이것을 전래받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서 성찬은 1년에 한두 차례 거행하는 빈약한 순서가 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찬에 관해서는 미완의 개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세계 교회의 예배가 초대교회 예배를 알게 되었고 빠르게 변화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유럽이 변했고, 20세기 후반에 북미 예배가 변했다. 이러한 개혁속도를 가속화시킨 것은 오늘날의 예배갱신의 필요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빠르게 전환됐다. 하나님의 임재를 귀로 듣는 복음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머징 예배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제 예배는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먹는 오감만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에서는 은혜를 귀로만 받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웨슬리에 이르기까지 성찬은 온 몸으로 경험케 하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성찬은 예배와 예식서(2016) 안에서 사중복음의 정체성을 담아 주일예배의 정규 순서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목회현장에서 성찬은 아직도 일 년에 한 두 차례 거행되는 의례일 뿐이다. 그나마 “빵을 가지사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주시며” 성도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던 예수님의 방식이 아니라 배달의 민족답게 성찬을 배달시킨다. 회중이 많으면 배찬하는 팀을 늘리면 된다.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 와 세상에 생명을 전해 주기 위해 빵이 되신 예수님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은혜의 통로이다. 회중을 주님의 탁자로 초대하고, 십자가 모양으로 모아진 회중의 손바닥 위에 주님의 빵을 놓아 주며, 초대교회 교부들처럼 “주님의 몸입니다”라고 말하며, 회중들은 이를 받을 때, “아멘”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성찬은 초대 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례 받은 신자로서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에게 매 주일 예배마다 주어져야 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