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필의 아현교회 진출과 3선 총회장

1957년 오영필은 서울 아현교회로 부임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교단적 입지가 한층 강화되었다. 아현교회는 1913년에 설립된 교회로 교단 모교회인 무교동교회(현 중앙교회)와 교세가 쌍벽을 이루는 교단 굴지의 교회였다. 아현교회는 교단 신학교인 서울신학교와 한 캠퍼스에 있어 많은 신학생들이 출석할 뿐 아니라, 해마다 미국의 저명한 성결학자들이 신학교의 특강과 아현교회의 집회가 열리는 등 교단에서 비중이 매우 큰 교회였다.

당시 아현교회 목사는 기도와 심방과 성서연구를 많이 하고 정치할 줄 모르는 전통적인 목회자의 표본으로 흠이 없고 성실한 목사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6.25전쟁 이후 시대적 사조가 수시로 급변하여 아현교회 담임목사는 전통적 목회스타일 보다 교단을 형성하는 상징성을 고려해 신학적 지성과 성결의 영성은 물론 정치력까지 두루 겸전한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는 어떤 묵계가 교단의 최고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발탁한 것이 오영필 목사였고 양 교회의 당회결의를 거쳐 두 목회자가 임지를 맞바꾸었다.

오영필 목사는 아현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성서적 강해설교로 은혜를 끼쳐, 신자들에게 성서의 오묘함과 관심을 유발하여 성경공부반이 개설되었고, 이를 통해 성경읽기와 성경퀴즈대회 등이 목회 프로그램으로 계속 등장하는 등 신자들을 성서적 인생관과 경건한 사명감으로 충만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회자였다. 그것은 그가 처음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이 ‘추수꾼의 사명’이어서 가는 곳마다 신자들을 가르치고 사명자들을 세우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서울에서도 서울신학대학 강사로 성경강해를 맡았다.

하루는 그의 집사 중에 기업체 사장을 하는 신자가 찾아와 상담했다. 어렸을 때 은혜 받아 교역자가 되기로 서원했는데, 먹고 살기에 바빠서 헌신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지금이라도 사업을 접고 헌신을 하겠으나 나이가 40대라 신학대학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야간 신학교를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성결교회는 야간신학교가 없으니 장로교 야간신학교에 가서 공부해서 교역자가 되라고 했다.

그는 깨달음이 와서 서울의 목사 중에 교육에 관심 있는 젊은 목사들과 상의했다. 늦게 부름받은 사명자들을 위해 지방회 단위로 야간신학교를 만들어 사명자들을 양성하자고 했다. 이에 동의한 젊은 목사들이 앞장서서 서울 교역자들을 설득했다. 처음에는 “서울신학대학이 있는데, 무슨 또 신학교냐?”고 반대하던 동료들도 나중에는 동의하여, 지방회 결의를 거쳐 총회의 허락까지 받았다. 그래서 1966년에 아현교회 교육관을 교실로 ‘수도성서신학교’가 개교했다. 오영필 목사가 초대 교장으로 3년간 인재양성을 하다 69년에 다른 목사에게 교장을 인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학생 중에 사회적 물의가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하여 매스컴에 떠들썩한 사회문제가 되어 1974년에 폐쇄했지만, 이 학교 출신으로 좋은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오영필은 아현교회에 부임한 이듬해에 교단 총회장으로 선출되고, 이듬해까지 연이어 총회장으로 봉사했다. 그리고 5년 후 1963년에도 총회장으로 또 선출되어 3선 총회장이 되었다. 이때는 예성이 분리되어 나간 직후여서 교단의 정체성 확립과 지도력 때문에 다시 그를 선택했다. 그는 1976년에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미자립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다 1984년 3월 14일, 80세로 사명에 찬 생애를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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