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적 부활이란?

홍성철 박사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다. 그처럼 놀라운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면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 5:20).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길 큰 일을 언급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위의 세 구절에 ‘살리느니라,’ ‘살아나리라,’ ‘부활로 나오리라’라는 표현은 모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표현에서 ‘살리다’의 뜻은 같지만, 살리는 내용과 시기는 전혀 다르다. 첫 번째,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는 어떤 역사를 가리키는가? 일찍이 하나님은 죽은 자를 두 번씩이나 살리셨는데, 하나는 사르밧 여인의 죽은 아들이었고(왕상 17:22), 또 하나는 수넴 여인의 죽은 늦둥이였다 (왕하 4:35).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은 짧은 공생애 기간 중 세 번씩이나 죽은 자들을 살리셨는데, 첫째는 회당장의 죽은 딸이었고(막 5:41~42), 둘째는 나인성의 과부의 죽은 독자였다(눅 7:ㅣ14~15). 셋째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였다(요 11:43~44). 하나님이 두 번씩이나 살리시고 예수님이 세 번씩 살리신 역사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의 부활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육체적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이 그 육체를 떠나갔다가 다시 그 영혼이 육체에 돌아온 것이다. 이런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듯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왕상 17:22) 그리고 그 시기도 과거에 일어난 육체적 부활을 강조한 것이었다.

두 번째의 ‘살리심’을 보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에서 ‘죽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모든 아담의 후손을 가리키는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아담은 물론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되면서 성령이 그 안으로 들어가신다. 이것은 현재에 거듭나서 영적으로 살게 된 것을 가리킨다.

세 번째,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는 미래, 곧 심판의 때에 일어날 부활을 가리킨다. 그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데, 믿는 자들은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되나, 믿지 않는 자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믿음이나, ‘악한 일’은 거부한 불신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짧은 말씀에서 이처럼 놀라운 삼중적인 부활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두 번째의 부활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살아나도 언젠가는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거듭나서 영적으로 살아나면, 현재의 삶도 의미 있게 되고, 미래에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영원한 향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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