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속한 사회는 수많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 그 이유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남미 독재정부가 자국 농부들에게 저물가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은 오로지 그들의 고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삶이었다. 어쩌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 나를 둘러싼 모든 경제적 행위가 이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비롯되었고 갈수록 그들의 삶은 더 비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싼 콜라를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뺨을 때리고 있는 것 같았다.”(현각,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 자신의 풍요로운 삶이 중남미인들의 고통을 기반으로 이뤄졌음을 깨달은 폴 뮌젠(Paul Muenzen)은 그 깨달음 때문에 자살을 결심했었다. 그러나 하버드대학원을 졸업한 후 그는 한국행을 감행했고 출가하여 ‘현각’으로 계를 받았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구 휘두르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가 자못 궁금하다. 그의 삶의 행적으로 보아 속물적 판단만은 단연코 거부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부끄럽게도 ‘내로남불’의 시대인 것 같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정치권의 청문회를 보면 하나같이 내로남불이고, 성령충만해서 대교회를 이루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다음엔 어김없이 세습타령이다. 묘하게도 청문회와 교회세습은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내로남불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무슨 숙명인 것처럼.

▨… 어느 사회학자(강수돌·팔꿈치사회)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옆 사람은 벗이나 동료가 아니라 팔꿈치로 가격하여 떨어뜨려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이런 세상에서 폴 뮌젠의 자각이 살아나고 ‘내로남불’의 비도덕성을 가슴아파하는 것은 그래도 우리 세상에서 어떤 희망의 끈을 붙들려는 노력 아니겠는가. 어느 생물학자(정연보·초유기체 인간)는 살짝 비틀었다. 세상의 부를 모든 인류가 고르게 나누어 갖는다면 천사들이 지구로 이민 올 것이 틀림없다고.

▨… 국제사회도 불평등이 강요되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 사회도 불평등을 입을 앙다물고서라도 감내해야 하는 구조이다. 아니, 입만 열면 사랑을 노래하는 기독교사회도 불평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으로 밀쳐두려한다. 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5백명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경제학의 진단같은 것은 애초부터 교회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면서, 우리교단의 부조리에 대해서 폴 뮌젠 만큼의 자각조차 없다면 작은교회 살리기는 강 건너 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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