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필의 3개월의 옥고와 교회재건

4년 동안 목회실습의 기간을 알차게 보낸 오영필은 1936년 봄에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충남 노성교회에 담임교역자로 첫 파송을 받는다. 그는 이미 부강교회와 신학생 목회실습을 통해 교회부흥의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에 그동안의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목회한 결과, 시골교회지만 노성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 그리고 질적으로 알차게 성장했다.

1942년 11월 말 교단의 기관지로 교역자들에게 힘찬 메시지로 격려하던 ‘활천’이 폐간되었다. 그가 여러 번 한시(漢詩)와 강해설교를 게재하고, 또 교회소식을 번번이 게재하여 목회자의 유일한 벗이었던 활천의 폐간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1943년 봄에 열린 제2회 연회에서 활천 폐간에 대한 이유를 보고받아 알았지만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물자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모든 잡지의 지면을 줄이도록 압력을 가해 20년 동안 60쪽으로 발행하던 활천이 20쪽 안팎으로 줄었고 거기에다 황국신민의 선서와 천황이나 황족가족의 사진들을 싣도록 함으로 신앙의 잡지가 일제의 홍보용지로 전락했다. 이렇게 되자 교단의 지도자들이 상의하여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절에 활천의 발간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자진 폐간 조치했다는 것이다.

1943년 봄에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중, 재림신앙에 신경을 쓰던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그 해 5월 24일을 기해, 전국의 성결교회의 교역자와 교회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교회예배 중에 구속하여 인근 경찰서에 수감했다. 오영필도 5월 28일에 체포되어 강경경찰서에 수감되어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씩 담당 경찰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런데 담당 경찰이 기독교에 대해 아주 깜깜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 “나는 불교신자인데, 종교는 다 같은 것 아닌가?”, “성결교회는 무엇이며, 장로교회는 또 무엇인가?”, “당신의 교회가 재림이 문제가 되었는데, 도대체 재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하고 묻는 등 기독교에 대해 전연 무식했다. 그래서 오영필은 이 사람에게 전도대상자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침착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천지창조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얘기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과 왕국의 건국,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대왕국의 멸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장과 활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세계 만국을 다스리시는 데, 머지않아 천군천사들을 거느리고 구름타고 오셔서 천하만국을 심판하신다는 진리를 설명했다.

그의 기독교 설명이 거의 한 달이나 계속 되었다. 놀라운 것은 처음 기세가 등등하던 경찰이 어느새 기가 꺾이고 그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감화가 된 듯 했다. 담당경찰의 덕분에 그는 옥중생활에 큰 어려움 없이 지냈고 3개월 후인 8월 30일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성결교회 폐쇄령이 내려졌고 12월 29일부로 해산명령을 받아 이웃교회 장로의 권유로, 장로의 과수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주일에는 과수원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는 해방의 기쁨도 잠시, 교회재건에 나섰다. 시무하던 노성교회를 먼저 재건하고, 공주교회에 가서 신자들을 불러 모아 재건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교단의 재건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그해 11월 9일 교단 재흥총회의 부서기로 앞장섰다. 그 후 조치원교회 시무 중, 6·25전쟁을 만나, 걸어서 대구에까지 피난 갔다가 봉산교회를 시무하면서 부산피난신학교 교수와 영남고등성경학교를 봉산교회에 개설, 많은 청년들을 교역자로 헌신케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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