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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호 교수의 골목길 기독교 역사산책 부산개항장 소통길
[1190호] 2019년 07월 10일 (수) 15:57:20 최석호 교수 webmaster@kehcnews.co.kr

   

소통길은 부산역에서 시작해서 청관거리, 영주동 산복도로, 40계단을 거쳐 용두산공원,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있는 왜관거리, 보수동 헌책방골목, 깡통시장, 자갈치시장을 둘러보고 다시 부산역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부산역 앞 큰 도로를 건너서 영주동 산동네로 올라간다.

산복도로에서 용두산공원까지 부산을 동서로 걷는다. 용두산공원에서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내려간다. 부산근대역사관에서 남포동 방향으로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가로지른 후 다시 내려간다. 부평시장에서 BIFF광장, 자갈치시장 등이 연이어서 나온다. 마지막 자갈치시장을 다시 가로지르면 끄트머리에서 지하철 자갈치역에 이른다. 자갈치역에서 두 구역을 타고 가면 다시 부산역이다. 부산개항장 소통길을 걷는다.

   
▲ 부산전경.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 선교사 베어드가 부산선교기지를 구축하면서 초량교회를 개척한다. 1890년 12월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한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2월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도착 즉시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부산을 답사한다.

삼일운동 중심지 초량교회
   
▲ 초량교회.
1892년 부산선교부 미완성 선교사 사택을 개방하여 영서현교회를 시작한다. 영주동으로 옮겨서 건축하면서 영주동교회라 이름 했다가 1922년 재건축하면서 초량삼일교회라 고쳐 부른다.

삼일독립운동이라는 뜻이다. 부산 독립운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일제가 탄압의 고삐를 조이면서 교회이름을 문제 삼는다. 삼위일체의 삼일이라고 둘러댄다. 1952년 초량교회와 삼일교회로 분립한다. 초량교회는 영주동 산동네에 그대로 남았다.

1898년 베어드 선교사는 대구와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긴다. 평양에서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을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 종합대학으로 키운다.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 즉 105인 사건으로 일제는 베어드 선교사를 숭실대학에서 물러나게 한다. 베어드 선교사는 숭실대학에서 물러났지만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죽기까지 조선에서 일하다가 조선 땅에 묻히겠다”는 말대로 1931년 11월 28일 71세를 일기로 소천해 숭실대학 교정에 묻혔다.

베어드 선교사는 초량교회를 시작하던 첫 해였던 1892년 첫 딸을 낳는다. 안타깝게도 1894년 뇌수막염으로 사망한다. 애니 베이드(Annie L. A. Baird) 사모는 시린 가슴을 찬송시로 달랜다. 애니 베어드 사모는 아픔을 노래한다. “멀리 멀리 갔더니”는 찬송가로 남았다.

부산선교기지에 병원을 시작한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찰스 어빈(1862-1933)이다. 찰스 어빈은 아내 베르다 어빈과 함께 1893년 부산선교기지에 도착한다. 1903년 부산 영주동에 기전병원, 1909년 상애원(한센병원) 등을 짓고 의료선교에 박차를 가한다. 1911년 선교부에서 나와 어을빈병원을 개업한다. 어을빈제약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만병수(萬病水)를 만든다.

만병수로 크게 성공한 찰스 어빈은 거금 30만 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한다. 1919년 초량교회 윤현진 집사는 이 독립운동자금을 들고 직접 상해로 간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 재무차장(재무장관)으로 일하던 중 순국한다.

독립운동 역사 간직한 백산기념관
40계단 위 좁은 도로 좌우에는 인쇄소가 많다. 서울로 치면 을지로 인쇄골목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광인쇄골목 끄트머리에서 도로를 건너 직진하면 왼쪽에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념하는 ‘백산기념관’이 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설뫼마을에서 농은 안발과 고성 이씨 사이에 사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난다. 일곱 살 된 1891년 집안 형님 되는 서간 안익제에게 한문을 배운다. 15세 된 1899년부터 경서를 읽는다. 1901년 의령군수가 백일장을 열었을 때 뛰어난 문장으로 한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한다. 1905년 21세 된 백산은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으로 오히려 나라를 해쳤다고 판단하고 상경한다.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한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중국으로 망명해 북간도와 연해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한다. 신채호·김동삼·안창호·이동휘·김구 등 독립운동 지도자를 만나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한다. 국내에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고 국외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기로 한다. 안희제 선생은 귀국 즉시 제지회사를 세워 2년 동안 운영한다. 1916년 고향전답 2000마지기를 팔아서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1917년 경주 최부자 최준, 동래부사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현의 맏아들 윤현태 등과 함께 백산상회를 합자회사로 전환한다. 

   
▲ 백산기념관.
1919년에는 자본금 100만 원 규모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전환한다. 백산 안희제는 최대 주주, 최준은 사장, 윤현태는 전무를 맡는다. 1917년 당시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은 20개 주식회사 중에서 경남방직과 함께 자본금 규모가 가장 큰 회사다.

회사는 빠른 속도로 부실기업이 된다. 1925년 최준 사장이 책임지고 사퇴한다. 1927년 백산 안희제가 직접 사장이 된다. 그러나 1928년 1월 29일 부채 130만 원을 떠안은 채 결국 파산한다.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68%를 조달했다.

1929년 중외일보 사장, 1930년 중외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 1931년 중앙일보 고문 등 언론계에 몸 담았던 백산 안희제 선생은 옛 발해 수도 영안현 동경성에 땅을 매입하기 시작한다. 1932년 농지를 개척하고 수로를 확장한다.

1933년 두 번째로 망명하여 발해농장을 경영한다. 1934년 대종교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이주시키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는 임오교변을 꾸며서 백산 안희제 선생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한다. 무려 8개월 동안 고문과 악형을 가한 일제는 1943년 9월 2일 병보석으로 석방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백산은 단정히 일어나 앉는다. “대전(大戰)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 이미 이탈리아가 패망하고 미·영·소 연합군이 득세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눕는다. 석방 몇 시간 되지 않아 운명한다.

광복을 되찾고 조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은 제일 먼저 경주 최부자 최준을 찾는다.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은 최준이 백산 안희제 선생을 통해 보내준 독립운동자금 장부를 펼쳐 보인다. 최준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건넨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금 명세서 수첩과 대조한다.

최준은 통곡한다. “백산! 준을 용서해 주게! 내가 준 자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절반이라도 전달되었으며 다행으로 늘 생각한 나를 용서해 주게!” 최준은 백산 순국 후에야 독립운동 자금이 정확하게 전달된 것을 알고 설뫼마을로 달려가 백산 묘소에 참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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