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카드의 사람

많은 사람들이 죽을 만큼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어려움을 만나고 때로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해 보일 때 사람들은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고 버려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며 항상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태양이 언제나 그 자리에 동일한 모습과 조건으로 있음과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자리에 동일한 모습으로 계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간 애굽의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히.파카드)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출 3:16)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내가 너희를 돌보아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에서 ‘돌보다’라는 번역이 썩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돌보다’란 말을 번역한 히브리어의 ‘파카드’란 말에 담겨 있는 ‘자세히 보다’, ‘살피다’(to make a careful inspection, to look over)란 신학적 뉴앙스를 간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를 잘 살려서 16절을 다시 번역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자세히 보아 살폈으며(히. 파카드),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다”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받을 때에도 예외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자세히 지켜보며 살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계속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에게서 떠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에게 더욱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사랑’이라고 하며, 또한 그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의 의미와 중심이 우리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당조차 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힘든 세상에서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의 통이 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를 ‘자세히 보시며 살피시고’(히. 파카드) 계신 사랑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젖먹이 어머니가 비록 그 젖먹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9:15)

이것이 바로 ‘파카드’가 주는 신학적 뉴앙스입니다. 당연히 우리를 하나님의 ‘파카드’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이것이 믿어지면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 주셨던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매 순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입니다. 이 믿음 하나만 가진다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또한 두려움과 외로움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삶이라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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