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0~22일 2박 3일간 이산가족상봉 대상자로 선정되어 신청자인 아버지(대포리교회 최동규 원로목사)를 모시고 북한을 다녀왔다.

북으로 가는 과정은 너무 힘들었다. 승용차로 1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 4~5시간을 허비하였다. 우리 쪽에서 출경심사를 받고 다시 북쪽으로 넘어가서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북측에서는 80세 이상 노인들은 출입국 심사를 받지 않고 버스에 앉아 있게 하고 직원들이 버스에 올라서 간단하게 확인만 하고 출입하게 해 주었다.

우리를 인솔하던 현대아산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금강산 관광 때에는 북측 병사들이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에 2m 간격으로 늘어서서 위압적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아무튼 북측의 변화된 태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

북한의 주민들은 우리의 선입관과 달리 꽤나 순박해 보였다. 차창으로 보는 북한의 모습은 우리나라 1970~80년대 농촌풍경과 흡사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는 사람, 일을 끝내고 트럭 뒤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 농민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듯 일렬로 줄지어 걸어가는 학생들, 그리고 간혹 보이는 병사들의 앳된 모습과 우리의 손길에 맞추어 손을 흔드는 병사들의 모습 등이 순박해 보였다.

이번에 만난 북의 사촌 누님(58세)과 사촌 남동생(47세)도 고생한 표정이 역력하여 겉모습은 필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지만 마음 씀씀이는 꽤나 순박하였다. 

특히 음식은 가족들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즐겨 드시던 참죽새순과 쑥솔기(쑥버무리), 그리고 상에 오른 쑥송편(바람떡), 팥소빵(팥빵), 단설기(조각케익) 등이 그것이다. 또한 ‘장은 담가야 제맛’이라는 말과 함께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지만 이제부터 장을 담가서 통일이 되면 나누어 주겠다는 누님의 마음은 더 없이 순박한 면모를 나타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점은 혈육에 대한 끈끈한 정이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언젠가 찾아오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을 위하여 가족들이 고향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 점과 자신들도 쉽게 접해 보지 못했을 북한 음식을 연신 우리에게 밀어 주는 모습, 그리고 건망증이 심해지신 아버지가 고향 산천에 대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계속 자상하게 대답을 들려주던 모습, 성례전에 쓸 용도로 포도주까지 구하자 상에 올라있던 것은 물론 다른 상에 있던 포도주를 챙겨주는 모습, 함께 하지 못한 다른 동생을 위하여 일반 술을 챙기는 모습, 그리고 돌아오는 차에 탑승한 우리를 향하여 눈물 지으며 손을 흔들던 모습 등은 혈육에 대한 애틋한 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꿈만 같은 2박 3일의 일정이 지나고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하며 우리는 또다시 헤어져야 하였다. 우리 안에 잠시 사라졌던 분단선이 다시금 솟아오른 것이다. 이제 또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아니 안부를 확인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는 긴 침묵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생사라도 확인했지만 아직 생사확인도 못한 이산가족들이 5만7,000명이나 된다.

그래서 화상상봉과 편지교환, 면회소 설치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이산가족들이 만나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밥상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감정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 내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오해와 증오를 씻고, 화합의 장을 넓혀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독일의 통일도 하루아침에 장벽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이산가족의 교류로 시작된 전반적인 교류가 전제되어 있었다. 사람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첫 단추는 당연히 이산가족들이다. 이제 더 이상 이산의 한을 품고 돌아가시는 가족들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