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자수성가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원산에서, 신치정은 ‘천정마을’에 샘물을 길어다 주었다. 말하자면 타향에서 물장수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소년에게는 천박해 보이나 건강과 노력으로라면 가능한 이 일이 안성맞춤이었으리라.

소년은 배를 골리면서도 꼬깃꼬깃 푼돈을 모았다. 닥치는 대로, 아니 일감을 구해 다니며 부지런히 일했다. 당당하게 잘들 사는 일본인마을에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새벽부터 식당을 돌고 음식물쓰레기를 가져다가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모으고 모은 돈을 털어 송아지를 샀다. 양계도 시작했다. 농촌에서 자란 소년은 일확천금은 모르고 농촌 식으로 살금살금 일어나더니, 어느 샌가 먹고살만해졌다. 교회 봉사도 점점 넉넉해지고 이웃사람들을 챙기기도 했다.

소년은 어느 정도 생활기반이 잡히자 집을 크게 짓고 11가구나 세를 주었다. 일본인들 보란 듯이 본인 집은 일본인마을 ‘천정’ 원산도립병원 위에다 큼직하니 번듯하게 잘 지었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13세 소년이 맨손으로 물도 산도 선 타향, 나라가 망해가는 시절에 그것도 일본인 마을에서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근면·성실한 성품에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적 삶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의 집에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나그네가 들끓었다. 그는 일본인들과도 친분이 좋아 동네 사람들은 그를 여러모로 많이 의지했고, 어느덧 동네 유지가 되었다. 보통 ‘신영수아바이’(영수‘領袖’는 그의 교회직분이다)로 불렸다. 그만큼 주변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됐다. 고향 후포리 친척들까지 원산으로 데려가 살게 했다.

그는 건장하고 위엄 있는 풍채에 성격은 대범했다. 하지만 맏딸이 3살 때 상처를 당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외손 윤영희·영석을 남달리 사랑했는데, 윤영희는 어쩌다 한 반에 한두 명 한인들 자녀가 있을까말까 한 일본인학교 원산고녀에서 예쁘고 똑똑하여 인기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영희가 기독교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후처의 딸들은 기독교학교인 진성여고에 다니게 했는데, 그 외손녀 한명은 보혜여자신학교를 다니며 교회에서 반주를 할 만큼 신앙이 좋았다. 그의 가정은 이처럼 모범적인 기독교가정이었다.

그의 신앙과 교회설립
신치정이 언제부터 신앙을 가졌는지, 어떻게 교회를 나갔는지, 누구의 인도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외손녀 윤영희 권사는 그의 신앙의 강조점을 ‘하나님은 유일신이시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이 얼마나 선명한 성경적, 기독교적 신앙인가. 이 진리, 이 확고한 신앙이 그를 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한 것이다.

그는 봉수동교회를 나간 후 새사람이 되어 구습을 버리고 오직 진리의 말씀을 따라 ‘개말마을’에 송흥리교회를 세웠다. 큰 주택을 수리해서 예배실로 사용했고, 신치정은 ‘영수(領袖)’ 직분으로 봉사했다. 신치정 영수의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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