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정치가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말한 ‘폴리스적 동물’(zoon politicon)이란 말은 그리스의 정체성과 역사 문화는 폴리스에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시아를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제에 비하여 그리스는 자유 시민으로 구성된 공동체로서 도시국가(Police)를 형성하고 유지해 왔다는 인식과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에서 개인은 자유시민이면서도 폴리스의 성원으로 살았고 공동의 과제를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과 언어’(logos)로 토론할 수 있었다. 교육과 훈련으로 습득한 수사학과 웅변으로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정치였다.

폴리스의 삶은 단순히 먹고 마심으로 존재하는 동물적 생명(zoe)과 구별된다. 견고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안전한 공적 공간에서 “어떻게 사느냐?”라는 문제를 이성과 언어를 기초로 이해하는 과정이 곧 정치였고, 미래의 가치를 설계하고 실천하며 함께 살아가는 생명을 가리켜 비오스(bios)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급자족하는데 급급한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고 서로 조율하며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공동체 속의 그리스인’을 가리켜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번역하면 “권력으로 지배하고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며,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공존할 줄 모른다면 그런 자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중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정치의 수준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26글자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가장 좋기로는 자연스러움을 따르고(故善者因之), 그 다음은 백성을 이익으로 이끌며(其次利道之), 그 다음은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려 들고(其次敎誨之), 그 다음은 백성을 바로잡는다고 똑같이 만들고(其次整齊之), 가장 못나기로는 백성과 다툰다(最下者與之)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정당정치의 목적은 정권을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헌신의 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장막을 옮기며 살아가던 조상들이 바라던 본향이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에 세워질 한 성이었음을 고백하였다(히 11:9,10,13,16).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정치는 장차 올 영구한 성(히 13:14)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폴리스(계 3:12)를 세워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교단총회를 앞두고 총회 부서의 이해관계, 여러 지방회의 갈등,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 등의 정치적 난제들이 충돌만 거듭하고 있다. 가장 좋은 정치는커녕, 누구에게도 도움(利道)이 되지 않는 자해 수준의 정치에, 자기만 잘 아는 것처럼 가르치려 들고(敎誨), 사회법으로 교회를 사회단체로 획일화(整齊)하고, 만나고 모였다하면 다툼(爭)을 일으키는 수준 이하의 저등급 정치를 본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마천도 백성을 무시하고 짜증내는 6등급 정치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에 대한 존중, 성경적 사랑의 원리, 성령을 통한 소통으로 교회정치의 수준을 좀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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