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철 교수
사순절에 ‘힐링’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에서 힐링은 트렌드가 되었다. 힐링은 유행어가 되었다. 유행어가 될 정도로 힐링은 우리에게 친근해졌다.

힐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힐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가? 힐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고통이 멎는 듯하지 않는가? 힐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침대에 누워 쉬면서 마사지를 받는 편안한 순간이 머리를 스쳐 가지 않는가?

그렇다. 힐링을 생각하면 ‘편안함’이 머리에 떠오른다. 힐링을 생각하면 무거운 짐이 저절로 내려지는 듯하다. 힐링을 생각하면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어느 순간에 힐링을 경험하는가? 척박한 도시생활을 하다가 한적한 곳에 가서 삼림욕을 하면 힐링이 되는 듯하다고 말한다. 경쟁사회에서 살면서 가끔씩 긍정적인 말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힐링이 된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음악을 듣거나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 힐링이 된다고 말한다. 피곤하여서 몸이 찌뿌둥할 때 경락마사지를 받으면 힐링이 된다고 한다. 바쁘게 회사 생활하다가 오랜만에 주말에 커피를 마시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 힐링이 된다고 말한다.

위와 같이 힐링을 이야기할 때 힐링은 세상이 말하는 힐링이 된다. 힐링은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힐링은 개인의 치유로 머물게 된다. 힐링은 개인의 내적인 욕구를 적절히 채워주거나 내면의 상처를 감싸주는 작업으로 그친다. 힐링은 혼자서만 체험하는 경험이 된다. 힐링은 개인이 홀로 경험하기에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있다.

또한 경락마사지를 받듯이 힐링은 ‘받는 것’으로 세속화되었다. 그래서 힐링은 수동적인 경험으로 머물게 된다. 힐링을 경험하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눈을 감으라고 하면 눈을 감고, 누우라고 하면 누우면 그만이다. 매우 편안한 과정이다. 힐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책임질 일이 없다. 힐링은 매우 개인적이고 수동적인 경험으로 세속화되었다. 힐링은 책임과 부담감이 동반되지 않는 편안한 과정으로 세속화되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힐링이다.

탄핵이 인용된 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분열된 국민을 치유하고 통합하는 메시지를 전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민을 실망하게하고 분노하게 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만을 위한 메시지로 머물렀다. 그 메시지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는 수동적인 메시지였다. 책임이 동반되는 적극적인 메시지가 아니었다. 결국에 국민은 치유되기보다는 더 분노하였다. 그래서 “사과는 못할망정 불복이라니 실낱같던 연민조차 사라진다”라고 말하는 국민도 있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메시지에는 세속적인 힐링이 느껴진다. 

세속적인 힐링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으로 머문다. 세속적인 힐링은 수동적인 경험으로 머문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힐링은 공동체적이고 적극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힐링은 서로가 함께 책임을 질 때 이루어진다.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그리하면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이사야 58:7~8)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약속했다.(요한복음 14:27)

‘편안’이 아니라 ‘평안’을 약속하신다. 편안은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평안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힐링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를 위한 힐링이다.

대통령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세속적인 힐링이 아니라, 성경이 약속한 힐링, 예수님이 주시는 힐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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