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종교개혁 현장을 가다 - 한국성결신문 한국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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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종교개혁 현장을 가다
성상 철거, 간소한 예배 등 현대교회 기초 형성
스위스 취리히서 펼쳐진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1078호] 2017년 02월 22일 (수) 16:52:34 조재석 기자 chojaeseuk@gmail.com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한 종교개혁가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적 설교를 시작했던 그로스뮌스터교회

종교개혁은 루터에 의해 널리 확산된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대에 걸출한 인물인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남부와 스위스 동북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예배당 내의 성화나 성상의 제거, 간소한 예배 형식 도입, 신앙공동체를 위한 성만찬 확립 등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더욱이 그의 개혁안은 오늘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취리히와 츠빙글리의 삶
루터가 작센 선제후라는 힘 있는 군주의 도움을 받았다면 츠빙글리는 시의회의 지원 아래 종교개혁을 펼쳤다. 그만큼 힘든 상황이었다. 루터보다 2개월 후인 1484년 1월에 태어난 츠빙글리는 바젤과 베른에서 인문주의 영향 아래 공부했으며, 22세에 사제가 됐다.

그는 1519년 취리히 대성당(그로스뮌스터교회)의 설교자가 되면서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강해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적 설교를 시작했다.

그가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사순절 금식과 소시지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츠빙글리는 성서의 권위를 강조한 저서를 출간하고 1523년 신학토론에서 ‘67개 논제'를 제출하며 종교개혁에 나섰다. 이후 취리히는 성서 중심의 설교를 강조하고 성인의 축제, 수도원과 미사를 폐지했으며 간소한 예배와 연 4회 성찬을 실시한다. 일부 교회의 성상과 성화 철거가 시작되자 우상숭배 타파와 교회 내 성유물 제거가 확산되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베른(1528)과 바젤(1529) 등 인근도시로 확대됐고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든든한 근거지가 된다. 하지만 일부 가톨릭 주들이 동맹을 결성하며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양측의 대립은 전쟁으로 비화됐다.

취리히에 도착해 림마트 강가에 위치한 츠빙글리의 동상을 찾았다. 1885년 세운 츠빙글리 동상은 왼손에는 성서를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었다. 동상 아래 안내판에는 그를 ‘취리히 종교개혁자, 휴머니스트, 성서번역자, 취리히 교회의 목사'로 부르고 있었다.

성서를 강조하고 중세교회의 가르침과 부패를 비판한 그는 설교와 저술, 토론으로 시민을 설득했다. 급진주의와 논쟁했지만 성상파괴 등은 수용했고, 종교개혁에 맞서 전투에 나섰다. 성서와 칼을 든 그는 “그런 선택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심 그로스뮌스터
   

그로스뮌스터교회 내부

츠빙글리 활동의 중심,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심지는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이다. 남쪽 청동문에는 츠빙글리의 삶이 담긴 ‘츠빙글리 문'이 있다. 청동문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찬식을 행하는 장면, 카펠 전투에서 죽는 장면 등을 하나하나 살폈다. 정문 쪽 블링거의 입상과 청동문에 담긴 성서 내용도 말씀을 강조한 츠빙글리의 영향인 듯 보인다.

교회 내부에는 독일교회서 볼 수 있는 성화나 성상, 교회 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의회 차원에서 철거를 결정한 개혁파 교회의 전형이다. 강단 앞 세례반 위의 성서와 설교단이 특히 눈이 가는데, 이곳에서 츠빙글리는 강해설교를 펼쳤다. 특히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고 1531년 독일어로 성서(취리히성서)를 출간했는데, 성서는 루터보다 3년 빠르다는 긍지를 드러내는 듯 했다. 츠빙글리는 또한 페스트에서 살아 돌아온 후 성서연구모임을 시작했고 1525년 6월 교회 내에 ‘예언학교(Prophezei)'를 설립한다. 종교개혁적 인물 양성과 성직자 재교육의 기관인 이 모임은 나중에 취리히 대학교로 발전했다고 한다. 모두 말씀을 중요시 여겼던 츠빙글리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했다.

교회 옆에는 츠빙글리와 블링거가 살았던 그로스뮌스터교회의 목회자 사택과 함께 츠빙글리가 죽기까지 머물렀던 집, 예언학교 교사들이 거주했던 집들이 있었다. 그 집에 쓰인 글귀 중 ‘1531년 10월 11일 취리히 군대와 함께 그가 신앙을 위하여 죽은 곳 카펠을 향하여 나아갔다'는 내용은 많은 감동을 남긴다. 교회 옆 옛 수도원 건물에는 제네바대학 신학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을 통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었다.

순교신앙지에 세운 바서교회와 프라우뮌스터
   

그로스뮌스터교회 츠빙글리문

바서교회(Wasserkirche)는 물 위에 지어진 교회로, 취리히교회 수호성인인 펠릭스와 레굴라 남매의 순교 역사를 품고 있는 교회이다. 두 사람은 기원전 3세기 로마 황제의 기독교박해 때 취리히로 도피했다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그로스뮌스터는 9세기 칼 대제가 순교에 감동한 후 그의 머리 유골이 묻힌 교회에 세운 교회이기도 하다.

바서교회는 종교개혁 시기 후 공공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1940년에 회복된 교회는 심플한 강단과 의자와 함께 옛 흔적을 갖춘 지하실이 인상 깊었다. 그곳에 있는 11~12세기 한 가족의 무덤은 4세기 순교터에 세워진 교회의 역사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순교정신의 계승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로스뮌스터의 맞은 편에 프라우뮌스터(Fraumunster) 교회가 있다. 13세기 독일 남부 귀족 여성을 위한 수녀원의 예배당인 이 교회는 종교개혁시기부터 지금까지 개신교회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부와 달리 예배당 내부는 단순했다. 그러나 프라우뮌스터 교회의 가장 큰 자랑은 20세기 최고의 화가의 한 사람인 마르크 샤갈의 스탠드글라스이다. 녹색 창문 위쪽의 예수 십자가는 다른 십자가 이상으로 예배당을 빛내고 았다. 프라우뮌스터 또한 세례반이 강단 중앙에 있는데 성경만 없을 뿐 취리히 교회의 특징인 것 같다.

페터스교회와 펠릭스 만츠 순교지
세인트 페터스교회는 취리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큰 시계탑이 아름다웠다. 종교개혁 시기 페터스교회는 츠빙글리와 함께 성서번역에 참여한 레오 유트(Leo Jud)가 1523~42년 목회했고, 1523년 9월 도시에서 처음으로 성화와 성상을 철거, 종교개혁에 큰 자취를 남겼다. 

마지막 방문지는 재세례파 ‘펠릭스 만츠'가 순교한 림마트 강이다. 그가 수장된 강가에 2004년 재세례파 박해를 사과하여 시가 세운 기념판이 놓여있었다.

재세례파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함께 했던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유아세례와 정치세력과의 관계 문제로 갈등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재세례를 행하며 ‘스위스 형제단'을 결성했다. 그들의 주장이 혼란을 일으키자 시의회는 그들을 처벌했는데 펠릭스 만츠는 1527년 림마트강에 수장됐다. 이후 수많은 재세례파가 유럽 전역에서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진영에서 죽임을 당하는 등 많은 상처를 받았다.

46세에 츠빙글리는 2차 카펠전투에서 다른 개신교 목사 20여 명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그의 시체는 조각내어 불태우고 재를 공중에 흩뿌렸다고 한다. 만약 츠빙글리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 남부와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놀랍게 변화됐을 것이다. 그의 사망으로 독일 남부는 루터교회로 전환했고, 스위스 종교개혁은 독일어권 취리히에서 프랑스어권 제네바로 넘겨져 칼뱅이 배턴을 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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