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사고방식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근간이 조선시대의 성리학(性理學)입니다. 실리보다는 명분과 체면을 앞세우는 의식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기술이나 생활양식을 모방하면서 살아온 한국인들이 실제로는 모방에 대해서 무척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다른 사람의 것을 잘 베끼면서도 보이는 곳에서는 모방은 절대 안된다고 외치곤 합니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계층은 선비들이었고 그들은 학문을 연마하여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이 인생최고의 목표였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교수나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존경과 신뢰를 보내곤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배운다는 의미에는 다른 사람에게 표현 할 수 없는 내면의 열등의식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것은 선비가 학문을 배우던 장인이 기술을 배우던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인들은 가르치는 사람은 훌륭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반면에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에 비해 뭔가 모자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신이 배워야하는 처지에 놓이면 체면과 명예가 손상된 것으로 생각하여 배움에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한국인들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입니다. 체면이나 명예보다 실리가 최우선입니다. 실리를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지금은 내가 공부와 기술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배우고 있지만 앞으로 열심히 배워서 노력하면 언젠가 자신이 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다 더 낳은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세상과 담을 쌓는 쇄국정책을 고수 했을 때 일본은 자국의 문을 활짝 열고 선진열강들의 앞선 제도와 기술과 문화를 열심히 배우고 수용해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20세기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의 국력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핵심단어는 “배우는 자세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을 보십시다. 나이가 어린 30대 초반의 초라해 보이는 청년 예수에게 3년간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체면과 명분보다 천국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늘나라의 지식과 문화를, 그리고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과 기사를 행하는 비법을 귀신을 쫓아내는 비결을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큰일을 해내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사랑과 존경이 넘쳐서 로마를 복음화 한 뒤에 이 세상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장로와 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젊은 예수에게 배운다는 것은 자신들의 체면과 명분에 걸맞지 않다하여 그를 시기하고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죽이도록 고발하고 송사하는 역사적인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대최고의 명문대학과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세상의 지식가요 권력가였으나 다마스커스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난 뒤에 아나니아에게 안수기도를 받아 눈을 새롭게 뜬 뒤에 초라해 보였던 예수의 가르침과 그 정신을 본받아 이 땅에서 사람이면서도 하늘의 신처럼 활동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위대한 성공과 초라한 실패의 차이는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의 차이입니다.

존경하는 성결교회 지도자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사도처럼, 요한웨슬리처럼, 아브라함 링컨처럼, 오늘 우리도 더 이상 나이와 체면을 계급으로 삼지 말고 나보다 앞 선자의 지식과 기술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서 “세계를 우리의 교구”로 삼는(Looking on the World is My Parish!) 위대한 성결교회 거룩한 크리스천이 됩시다. 배우는 자의 자세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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