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롬 7:24)

김희성 교수
위 구절에 나온 유명한 탄식은 ‘나’가 누구인가와 그 ‘나’가 놓여있는 절망적인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에 관한 규명 때문에 현재 학계만이 아니라 교회사적으로도 논란이 무척 많았던 구절에 속한다.

이 탄식에 관하여 대체로 다음의 다섯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다. 첫째로 ‘나 자신’을 바울로 국한 시키고 이 탄식을 바울의 특유한 경험이라고 본다. 둘째로 ‘나 자신’을 바울이 대표하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으로 보고 이 탄식을 그들의 절망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본다. 셋째로 ‘나 자신’을 율법이 삶의 모든 것인 유대인으로 규정하고 이 탄식을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절망적인 탄식 경험으로 본다. 넷째로 ‘나 자신’을 아직 변화되지 않은 기독교인으로 보고 이 탄식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하는데 오히려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갈등에서 일어나는 절망적인 탄식의 경험으로 본다. 다섯째로 ‘나 자신’을 변화했건 변화하지 않았건 모든 기독교인으로 보고 그들이 다 절망을 토로하는 경험으로 본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올바른 해석을 찾기 위해서 본문뿐만 아니라 바울의 인간 이해도 살펴봐야 한다. 이 탄식에서 가장 앞에 나와 강조된 단어는 ‘곤고한’(탈라이포로스)이다. 이 단어는 인간의 불행하고도 불쌍한 상태를 표시한다. 중간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는 표피적이고 지상적인 인간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이 단어는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불행하고 불쌍한 상태를 의미한다.

‘곤고하다 나라는 사람은’이라고 외치는 ‘나’는 바울의 인간 이해에서 바르게 포착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인과 그리스도인으로 가를 수 있고, 그리스도인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세분할 수 있다. 자연인은 물론이고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도 육의 사람에 속한다. 육의 사람은 전적인 인간이고, 그러한 ‘나’는 육(싸륵스)과 동일하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아직도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라 자신이 주다. 생명을 갈망하나 육의 욕망을 따르게 되어 죽음을 생산한다. 죄의 종으로 사망의 몸에 속해 있어 구원받지 못한 ‘나’이고, 몸의 부활과 하나님의 영광과 자유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 로마서 7장의 탄식에서 ‘나’는 회심 전의 바울도 아니고, 율법에 대면하여 사는 유대인으로서의 ‘나’도 아니다. 율법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탄식을 토로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절규를 터트리는 자인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죄의 종으로 머물러 있어서 구원받지 못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다. 

탄식의 두 번째 문장은 기도의 탄원에 속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망의 몸’에서 사망은 몸을 수식하는 성질의 속격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래서 ‘사망의 몸’은 몸의 성질이 사망이라는 뜻을 시사한다. 사망은 몸의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과 맞서 있는 영원한 사망을 뜻한다.

몸은 바울에게 있어서 소화기관이나 성적인 기관이나 신체 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여기 혹은 저기에 속하여 누구의 것이 될 수 있어서 그리스도의 지체나 창기의 지체가 된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몸을 샀기 때문에(고전 6:20) 그 몸이 더 이상 창기에게 속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몸 위에 있기 때문에 그 몸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사용되어야 한다.(롬 12:1) 이제는 죄가 더 이상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롬 6:11이하 특히 13절).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의에 대하여는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몸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이 그렇게 강하게 맺어져서 몸이 주께 속한 것만이 아니라 주가 몸에 속한다.(고전 6:13) 그러한 몸이 된 기독교인은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자로서 성령에 따라 행동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기독교인이다.(롬 8장)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절규는 유대교와 헬라 영역에도 병행들이 있다. 그것들과 비교하면, 이 절규는 죄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절망을 과격하게 표현하고, 거기서 구원해 주도록 구원자를 불러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절규이다. 그 구원자가 바로 다음 구절인 25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절규를 하도록 사망의 몸이라는 것을 아는 자각은 내가 죽었다는 죽음의 경험에서 나온다. 죽음의 경험의 선취는 새 생명의 열매다. 거기서부터 죽음 저편에 있는 생명을 얻는 새로운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자의 탄식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나의 지체로 투쟁하면서 더 이상 죽음을 생산하는 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의 생명을 발견한 자 중의 하나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와 생명을 향한 절규는 아직도 죄와 사망에 종된 자들에게 자신들의 상황과 자신들의 무력함의 경험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새 생명의 희망을 보여준다.(참조. 롬 8장) 네 번째 해석이 바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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