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많은데 이상하게 잣나무에 대해서 무심했다는 것을 잣나무 숲에 서서야 깨달았다. 소나무와 비슷해서 홍송이라고 부르는 것과 이파리가 다섯이라 오엽송 정도가 내게 입력된 잣나무 정체의 전부였다. 잣나무에 무심한 이유 중 하나가 혹시 ‘잣’ 때문일 수도 있었겠다. 열매 때문에 사람의 손을 타는 잣나무를 소나무보다 낮은 격으로 내심 이해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식물의 열매로 생명을 이어가면서도.

오래된 공원이나 묵은 동네의 가로수, 야트막한 산자락들에도 잣나무는 아주 흔하게 분포되어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잣나무는 소나무처럼, 소나무는 잣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두 나무는 같은 소나뭇과다. 식물들에게 별로 곁을 주지 않는 냉정한 소나무인데도 잣나무는 사촌쯤으로 여기는지 어우렁더우렁이다. 송무백열(松茂栢悅), ‘소나무가 잘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사자성어대로라면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파하는 사람보다 잣나무의 격이 위다.  

워낙 비를 좋아해서 비가 제법 올 거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 사놓은 장화까지 찾아 신고 우산을 챙겨 들었다. ‘잣향기 푸른숲’은 축령산자락에 있다. 고도가 조금 있어선지 한참 오르막길을 지나서 주차장이 나타난다. 입구에 피어나있던 코스모스, 우리말로 살살이꽃은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등으로 맞고 있었다. 멀리 산그리메가 셀 수 없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안개와 비구름이 마치 신부의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지인 중 한 분이 암수술을 했다. 암이라는 게 수술을 했다고 해서 일망타진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잠시 물러나 있다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아주 약삭빠른 종자이다. 몸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데 피곤하기만 하면 가까이 있는 숲으로 갔다고 했다. 답답하던 마음만 가라앉는 게 아니고 숲에 들어서면 실제 숨 쉬는 것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러더니 정말 완치가 되었다며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사람의 운명이야 하나님 손에 달렸으니 어찌 숲의 힘이랴만 숲을 창조하신 이도 그분이시니 그녀에게는 치유의 숲이었으리.

평생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다녔던 윌리암 터너가 말했다. “풍경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숲을 향해 걸으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런 설렘은 행복이나 기쁨 즐거움보다 더 강한 엔도르핀을 발생하게 하여….

내 경우엔 삶의 신산을 잊게 하면서 다시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동력을 생성해준다. 내가 숲을 찾는 가장 큰 이유다. 푸른숲의 잣나무는 동네에서 보던 잣나무와 전혀 다른 종처럼 여겨졌다. 반듯하고 곧게 뻗은 품새가 꿈속에서나 나타날법한 남성(?)이었다. 그가 내뿜는  견고한 생명의 호흡이라니, 그가 지닌 아름답고 순수한 에너지가 너울거리며 몸속으로 들이찬다.

푸르른 기상을 지닌 존재만으로 창조주를 찬양하는 웅혼한 합창소리를 들었다면 나만의 추성부일까, 평평하지 않은 산세 속에서 곧고 아름답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푸른숲 잣나무들은 저 위에 가서야 가지를 새로이 냈다. 물론 그 가지조차 결기 있어 보인다. 우선은 내실을 다지고…. 다 자란 뒤에야 새로운 가지를 내는 것은 열매를 맺고 보존하기 위한 지혜로운 포석일 것이다.

아름드리 셀 수도 없는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푸른숲은 삶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사물, 일, 사유까지도 해체시켜버리는 어떤 절대적 숭고!를 느끼게 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지고지순한 자태!

그렇다. 사람 없는 비 내리는 숲, 잣나무로 가득 찬 숲은 그 순간 세상을 잊게 하고 나를 초월해버리는 나만의 지극한 성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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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욥기 14:7)
학명은 피누스 코라이엔시스(Pinus koraiensis)로 종명koraiensis은  한국고유종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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