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때 총상을 입어 한 쪽 다리에 장애를 가진 장인께서는 늘 옛날 추억이 있는 곳들을 다녀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내 나이 서른여덟이 되던 해, 아내와 의논하여 그 해는 부모님을 모시고 특별한 휴가로 추억여행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평소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장인어른의 회갑에 조촐한 잔치도 못해드리고 이태를 지났을 때입니다. 장인께서 건강상태가 상당히 좋아졌고 우리도 여름휴가를 늦춰 그 분의 63세 생신에 맞추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얼마 전에 승용차를 마련해 주어서 새 차를 몰고 기분 좋게 강원도 영월까지 갔습니다. 처가에서 하루를 자고 형제들이 다 함께 모여 장인어른의 생신을 축하하여 예배를 드리고 장모님께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나누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출발하여 울진으로 향했습니다. 장인께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로 경찰에 투신한 후 젊은 시절 울진 경찰서에 근무하셔서 아내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나지막한 옛 집이 수십 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내의 기억에는 동생이 급류에 떠내려가서 한참 아래에서 건져냈다는 큰 개울이 지금은 조그만 도랑에 생활하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정성껏 마련한 점심 도시락을 아버지께 전해 드리면 아버지는 기특한 맏딸에게 자장면을 시켜주었다는 그 중국음식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공유할 추억이 없었지만 그때 그 시절 부모님의 나이만큼이나 어른이 된 아내가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그 시절에 내가 곁에 있었던 것처럼 그림들이 떠올랐습니다.

강릉을 거쳐 경포대 비치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주문진 시장에서 싱싱한 회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모처럼 밤늦게까지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경포대 해수욕장 근처 솔밭에는 영월 출신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음식점을 하는 지인이 있어 아침은 순두부로 가볍게 먹고 짧은 일정이지만 부모님을 댁으로 모셔드리고 목요일 밤 늦게 먼 길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주일 준비로 분주한 시간에 장인께서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왔습니다. 저녁식사를 하시다가 밥상 앞에서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심근경색으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로 운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나는 그 길로 5시간을 달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영월에 도착하여 형제들과 장례절차를 의논하고 다시 새벽에 출발하여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 채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낮 예배 후 다시 영월로 달려가서 월요일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며칠 후 정신을 좀 차린 장모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갈 줄을 누가 알았나. 그래도 평생을 가보고 싶다던 곳을 가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렇게도 사랑하던 맏딸과 실컷 얘기하고 갔으니, 자네가 마지막으로 큰 효도를 했네. 참 고마우이”

이제 우리의 아이들이 그 때 내 나이만큼이나 먹고 나도 장인께서 돌아가시던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새삼 “그 때 정말 잘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올 휴가는 늘 소외되었던 부모님께 관심을 돌려 추억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송대(宋代)의 유학자 주자는 열 가지 후회를 말하면서 맨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不孝父母, 死後悔)”라고 하였고 『시경(詩經)』의 해설서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奉養)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했습니다. 또 성경의 지혜자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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