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은 웃었지만 천사는 눈물을”

설교에서의 유머 사용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본질적으로 희락의 사건이요, 기쁨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에서 울음이 허용된다면 웃음도 허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유머는 설교에서 그 이상이다.

유머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설교에 기여한다.
첫째 유머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존재하는 어색한 마음의 벽을 해제한다. 강단에 섰을 때 회중석의 냉랭함이나 혹은 찌푸린 저항감은 엉뚱하지만 함께 웃게 되면 쉽게 무너진다. 제임스 콕스(J. Cox)는 말한다. “유머만큼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사람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며 청중으로 하여금 우호적인 태도를 유발시키는 윤활유는 없다.”

둘째, 유머는 긴장을 완화시킨다. 일반적으로 회중은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정신적 집중이나 정서적 압박을 지속적으로 지탱해 나가기 어렵다. 웃음은 가장 간단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회중의 긴장을 완화시켜준다.

셋째, 유머는 관심을 유발한다. 유머는 설교시 다른 것에 관심을 빼앗긴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확보한다. 그런 까닭에 오토버그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긴 설교에서는 의도적으로 유머를 설교에 삽입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와같이 유머는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효율적인 기술이요, 전달의 도구이다. 그러나 유머의 다양한 잇점에도 불구하고 설교에서의 유머 사용이 지켜야 할 적절한 중도가 있다. 설교학자, 해돈 로빈슨(H. Robinson)은 유머가 가지는 위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유머는 설교 중에서 적합하게 사용되기 보다는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농담 자체에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시 유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그맨이 아니라 말씀의 종으로 강단에 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유머사용의 원칙은 무엇인가?
첫째 유머는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유머는 단순히 회중을 웃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시녀로 설교를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유머를 사용할 때 그것은 설교 메시지를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의 중요성을 해돈 로빈슨은 이렇게 단언한다. “유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진리를 드러내는 데 있다”

둘째, 유머는 적절해야 한다. 설교에서 유머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의 일부이다. 유머는 설교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설교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또한 설교에서의 유머는 거룩한 강단에 어울리지 않는 저속한 것이어서는 안되며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거나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셋째, 유머와 경솔함을 구별하라. 유머는 즐거움을 주지만 경솔함은 가벼움과 무례함으로 회중에게 불쾌감을 준다. 존 파이퍼는 이것의 구별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설교에는 반드시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진지함의 반대는 기쁨이 아니라 사소함, 경박함, 천박함이다. 유머를 구성하는 요소와 진지함은 상존할 수 있지만 경박함과 진지함은 상존할 수 없다.”

넷째, 유머의 소재와 주제를 잘 선정하라. 설교의 유머에서 절대로으로 피해야 하는 주제는 인종적 차이, 나이, 신체적 결함과 같은 소재이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죄인인 인간에게 부적절하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 심판과 같은 신앙의 엄숙한 실재를 우스갯감으로 만든다면 진리를 하찮게 만드는 것이다. “청중은 웃었지만 천사는 눈물을 흘렸다”는 슬픈 말처럼, 청중도, 천사들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유머를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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