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지방 70주년기념 목사 장로 연합수련회를 다녀와서-

위영 사모
서울서지방회가 설립된 지 70년이 되었다. 유서 깊은 지방회답게  연합과 화합이라는 아름다운 기치를 내걸고 목사 장로 수련회를 개최했다.

70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황을 마친 의미 깊은 연수라는 가이드북의 권두언도 있었지만 솔직한 마음은 백두산 천지에 피어나 있을 두메양귀비를 알현, 천지와 함께 한 컷! 하는 것이었다. 한 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대련에서 내려 옥수수 밭이 한도 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달려 단동으로 갔다.

다음날에는 한국 제일의 강줄기인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강 건너는 북한이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은 오직 북한쪽에만 머물고 있었다. 중국 쪽과는 달리 강어귀에 가로수 나무조차 한그루 변변하게 없는 모습, 붉은 흙을 들어내는 산의 능선들이 가슴 아팠다.

고구려 시대 우리나라의 영토였을 <환인>에서는 오녀산성 곁에 세워진 박물관을 관람했다.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흘승골성 또는 졸본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 곳으로 정상은 넓고 평평하며 수많은 사람이 먹어도 되는 샘이 있다고 한다. 오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어디 객들의 여건이 그러한가.

두 번째 밤을 보내고 나서도 백두산 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도시락을 들고 버스를 타 무려 네 시간을 소요해서야 서파에 도착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40여분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성하고 푸르른 여름 숲 사이로 자작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다래 잎은 꽃보다 더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내게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색다른 식물을 만나는 일이다. 1442개의 계단을 오르면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천지에 다다랐을 때 안개를 걷어주셔서 꼭꼭 두메양귀비 보게 해주세요, 공평하신 주님께서 이런 이기적인 기도를 들어주실 리 만무하시다. 천지는 지척도 허용치 않는 완강한 안개의 제국이었다. 낯선 나라였다. 셔터 누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천지방향을 바라보다가 거기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천지가 자연스레 천국으로 연상되어졌다. 미망의 그늘이 한 겹 젖혀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음이 갑자기 유쾌해졌다.

산을 내려와 지안으로 향했다. 지안은 고구려 문화의 발상지이자 유리왕 시대 수도였던 곳으로 고구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귀족의 무덤’이라고 명명된 고구려의 무덤 안 그림은  세기 전에 그렸을 그림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이 아름다웠다. 돌에 새겨진 색들은 아직도 선명했고 좌청룡 우백호와 고구려의 생활상을 나타내주고 있는 그림들은 거침없이 강하면서 그 선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광개토왕비의 위용도 감개무량했다. 그 아득한 시절에 이런 커다란 돌에 글을 새기다니… 소실된 글씨조차 역사와 시간의 흔적처럼 여겨져  가슴 저렸다. 그제야 감이 왔는데 우리가 밟고 있는 땅들이 고구려 시절에는 다 우리의 영토였던 곳이었다. 그렇구나.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져 왔다. 그러다가 짓고 있는 건물 앞에 세워진 팻말 ‘고구려28대왕 박람관’을 보았다. 천지 오르는 버스 안에는 거의 모두가 대한민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글 안내 한번 없이 줄곧 중국어로만 안내하던 중국이 기이하게도 장수왕 박물관 팻말은 친절하게도 한국어로 적어 놓았다.

“고구려는 조기중국 북방의 소수정권입니다.”라고 시작된 이 팻말의 내용인즉슨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며 중앙정부(당나라)와의 내전을 통해 완전히 멸망했고 고구려의 멸망은 필연적인 역사의 순리라는 이야기가 문맥조차 맞지 않는 어설픈 한국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매스컴에서만 대하던 중국의 동북공정을 실제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왜곡 정도가 아니라 역사를 도둑질하는 짓이다. 성서를 가져가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재단하는 이단의 짓과 흡사한 일이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고 신채호 선생은 말했다. 

“우리가 쓸데없는 도움을 바라다가 우리 눈이 쇠약해졌으니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에 도움을 기대하였음이라” (예레미야애가 4:17) 선명한 기도제목이 생긴 수련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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