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풀려가고 있는 게 다행이고 고맙다. 정치인들이야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고도의 셈법을 갖고 따지겠지만, 그런 계산으로도 해빙이 서로 이득이 되는 모양이니 감사하다. 남북관계와 연관된 민간차원의 여러 분야에서는 남북관계의 평화적 틀이 아주 중요하다. 유엔이나 인도적인 국제 활동에서 남북관계는 이미 한반도나 동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긴 우리나라의 일부에서나 민족 내부적인 사건으로 단순하게 인식하고 있지, 6.25전쟁 자체가 국제적인 역사 흐름의 질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도 들쭉날쭉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게 남북관계이다. 위에 인용한 글은 2013년 8월에 본 지면에 실린 필자의 시론 첫 부분이다. 제목이 ‘디엠지(DMZ) 평화공원의 경우’이다. 지금 이 주제로 다시 쓴다면 이렇게 시작해야 하리라.

‘남북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게 심각하다. 참 걱정이다. 정치인들이야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고도의 셈법을 갖고 따지겠지만, 그런 계산으로도 긴장 고조가 서로 이득이 되는 모양이니 더 걱정이다.’

삼년 전의 칼럼에 이런 내용도 썼다.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샬롬 곧 하나님의 평화는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기독교 신앙이 인류 역사에 또는 교회가 존재하는 지역의 삶을 위해 공헌한 때는 늘 평화의 삶을 일구었던 때였다. 반면 교회가 신앙의 이름으로 삶과 역사를 파괴했던 때는 언제나 갈등과 전쟁을 교리적인 논리로 왜곡했을 때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1)우리 사회, (2)남북 공동체, (3)한중일을 중심한 동아시아, (4)한반도와 연관된 세계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이런 일은 하면 안 된다고 명토를 박아 얘기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사회 안의 정치적 상황에 편승하여 쉽게 어느 쪽을 편드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교회의 바람직한 영향력을 점점 떨어뜨린다.

조금만 생각해 보라. 교회가 가져야 할 영향력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현재 기독교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여러 종류의 정치권 세력들이 기독교를 충분히 인식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정치적 게임의 룰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에서는 주로 치열하고 비열한 정치 셈법만 존재한다. 인륜도덕이나 신앙적 가치 등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정치권은 교계를 최대한 이용하려 들고 교계 정치꾼들은 자기 이익을 챙긴다. 교계 연합단체나 교단의 지도자들이 여야나 보수진보가 대립하는 사안에서 종종 정치적 편들기에 나서는 것이 우리 현실이니 깊이 유감스럽다.

한국 교회는 남북관계에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대립하는 정치 세력들의 관심사를 훌쩍 뛰어넘는, 그래서 대립하는 어느 세력도 기본적으로는 이의를 달지 못하는 의제를 고집스럽게 붙잡아야 한다. 그런 의제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로 더 높아지는 남북의 대치 국면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상황이 가져온 동아시아의 군사력 경쟁 상황에서 꺼져가는 듯 보이는 의제가 바로 ‘평화’다.

평화를 주제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기본적으로 말하면 갈등과 충돌, 전쟁과 패권주의 쪽으로 가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가 그런 방향에 앞장서거나 힘을 보탠다면 교회답지 않다. 한국 교계의 모든 연합단체가 함께 모여 ‘평화에 목마른 사람들의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교회들과 손잡아야 한다. 여기에 국제적인 기독교 단체들이 이어져야 한다.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고들 한다.  까닥 잘못하면 한반도가 세계의 화약고가 될 수도 있다. 미중 양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상황은 이제 더욱 분명하게 세계적인 사안이 되었다. 한반도를 중심한 오늘날의 상황은 한국 교회의 시험대이다. 성경의 근본 메시지인 샬롬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국 교회여, 스스로 물어보자. 진정 그대는 평화에 목마른가? 예수는 그러셨다.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이 실제 전쟁 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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