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전화에서 ‘빕’ 소리가 들렸다. 어떤 언론사의 긴급뉴스 보도였다. “딸 때려 죽인 아버지, 독일 유학파 목사”라는 제목이 떴다. 앱을 열어 상세히 읽었다. 충격, 충격, 또 충격이었다. 13세의 딸을 야만적으로 폭행 살해한 사건이 최근 발각되었는데 그 범인 아버지가 바로 목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독일에 유학해서 박사학위도 취득했고,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교회도 담임한다는 보도였다. 이름은 그냥 A 목사(48)란다.

가정은 복잡했다. 독일 유학 중 첫 아내가 죽어 재혼을 했다. 자녀가 3명 있었다. 아빠에게 맞아 죽은 C 양은 가출과 도벽이 있었다. 계모와도 갈등의 파고가 높았으리라. 그래서 청소년기 C 양의 가출, 비행, 도벽 등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목사’라는 이름이 또 한 번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목사들끼리 하는 말 ‘목사라는 글자에서 한 쪽이 떨어져 나가면 독사가 된다’는 자조 그대로다. 낮에는 자비로운 의사였지만 밤에는 잔인한 살인범이었다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소설도 있지 않은가. 가룟 유다도 두 얼굴 곧 천사와 사탄의 얼굴을 함께 가진 자였다. 아무튼 A목사는 신자와 학생들에게는 목사이고 제 딸에게는 독사였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아는 한국인의 하나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학자 아닌가. 그 나이에 헬라어 원문으로 신약성경을 읽을 수 있는 한국인 목사와 교수가 몇이나 될까. 게다가 영어와 독일말로 책을 읽고 신학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고, 설교할 때마다 구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들먹였을 것 아닌가. 그런데 어쩌다가 지옥 아랫목으로 떨어지고 말았는가.

목회학에서는 목사 자신은 자기 가족을 교회 신자만큼이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목회를 빌미로 아내나 자녀를 학대하는 이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여전도회장만큼 존중하고, 자녀는 교회학교 학생만큼이라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 제 어린 양인 딸을 쇠몽둥이로 패서 죽였던가. 그 타락한 딸을 살리기 위하여 애비 자신이 먼저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라이스, 현재 독일수상인 메르켈이 목사의 딸이라는 걸 독일 유학한 그가 몰랐을까.

아직 수사가 초입단계여서 누구를 범인으로 단정하기는 조심스럽다. 특히 독일 유학파로 신학교육과 목회를 하는 자가 그런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건의 흥미성 때문에 그 목사의 선행이나 자기변호가 가려졌을 수도 있다. 또 목사에게는 아무리 선량해도 반대세력이 있고, 아무리 악랄해도 지지세력이 있다는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

A목사는 필경 요한복음을 첫 번 헬라어 교재로 사용했을 것이다. 초급만 배워도 헬라말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목회자의 최고 표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목회대헌장’이 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요 10:11). 그분은 그 헌장 그대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길을 선택하셨다.

2005년도에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에 ‘교회공신력향상특별위원회’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 목사들의 비리, 스캔들, 갈등 그리고 교회내분 등이 갑작스레 펑펑 터져 나오던 때였다. 그래서 목회자 윤리지침도 발표하고 교회공신력향상 방안도 마련해서 공고하는 등 교회의 공신력 향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어떤 언론인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교회공신력향상이 문제가 아니라 목사님들의 공신력향상이 더 큰 문제 아닌가요?”

그렇다. 지금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 문제는 무엇보다도 목사 지망생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목사다운 목사를 찾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거는 목회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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