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밝았다. 새 달력을 걸었을 뿐인데 온 천지가 새로워진 것 같은 느낌에 젖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무슨 조화에서일까.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음을 밝혀 준 성서의 말씀을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지난 한 해가, 지나온 날들이 버겁기만 했었던 범인들은 새해에는 새로운 일들로 가득했으면 하는 기대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린다. 그런 자신을 바보같다고 살짝 부끄러워하면서도.

▨… 진실로 날이 새롭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로이 하라(苟日新구일신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 ‘대학’에 있는 이 말은 우리를 향해서 새로운 날은 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새로워짐에 있다고 일러준다. 아무리 새 달력을 바꿔 건다고 해도 자신이 옛사람의 모습인채 그대로 갇혀 있다면 궁극적으로 새해도, 새 것도 없음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 어느 ‘가나안 성도’(신앙은 있으나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의 ‘안나가’를 거꾸로 읽는다)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교회 안나가는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이상한 설교하기만 해봐”, “본인이나 좀 잘하시지, 이건 본인이 들으셔야 하는 설교 아니야?”, “웬 자신감으로 성도들에게 저걸 요구해?” 언제부터인가 이런 삐딱한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민망하고 또 그런 자신이 괴로워져서 교회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 현장의 목회자들이 우려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가나안 성도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이 가나안 성도들의 삐딱한 마음을 내 탓이라고 읽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목회자들에게서 살아나지 못한다면 교회의 새날은 탁상토론에만 머물 것이고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막지 못할 것이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지만 나 자신이 새로워지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는(고후 5:17) 새날은 분명 밝아질 것이다.

▨… 본회퍼(D.Bonhoeffer)는 그의 ‘윤리학’에서 하나님과 세계가 분열되어 있는 한 누구도 분열되지 않은 눈으로 하나님과 현실세계를 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세계의 현실성이 화해된 곳,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된 곳,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말이 현실이 될 때라야  새 날, 새 세상의 출발은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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