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부흥운동이며 성결교회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결교회는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부흥운동에 대한 강한 전통 속에서 성장해 왔다. 웨슬리의 18세기 개혁운동은 사실 부흥운동이었다. 성서와 함께 체험을 강조하고 있고 대중지향적인 운동이었다. 특히 성결운동은 간증, 찬양과 같은 것을 통해 대중과 강한 연대감을 가졌다. 또 성결운동은 교회 갱신운동으로 18세기 웨슬리, 19세기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19세기의 성결운동도 교회갱신을 위해 나타났다.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적 특징>
1907년 한국성결교회는 이런 부흥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사실 1907년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절정을 이룬 때였다. 그러나 이후 부흥운동의 열기는 식어가는 상황에서 다시 부흥운동을 일으킨 곳이 한국성결교회이다. 1908년부터 일기 시작한 구리개전도관의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김상준은 전국적인 부흥사가 되었다.

그러나 성결교회의 본격적인 부흥운동은 1921년 경성성서학원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이명직 목사의 회개로부터 시작한 이 부흥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대 부흥운동의 중심에는 정남수 목사가 있다. 그가 자동차에 악기를 싣고 다니며 거대한 천막을 치고 집회를 연 광경은 당시로 거대한 구경거리였다. 1937년 새롭게 등장한 부흥사가 있는데, 바로 이성봉 목사다. 그는 구성진 노래와 리듬있는 어조로 대중을 사로잡은 그의 메시지는 일제 말과 해방 후 어두운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1960년대 한국성결교회는 이만신 목사를 통해 새로운 부흥운동 시대를 열었다. 성결교회 전통과 60년대 불기 시작한 적극적 사고방식을 조화시킨 말씀과 함께 신자의 소극적 삶에서 적극적 삶을 강조하였다.

<성결교회와 부흥운동>
이러한 한국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성결교회 부흥회는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회개는 내면의 죄에 대한 정확한 지적에서 출발하였으며 죄의 회개, 내면의 변화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둘째,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은 삶의 변화가 동반되었다. 회개는 추상적 회개가 아니라 구체적인 배상을 포함하였고 말로 지은 죄는 말로, 물질로 지은 죄는 물질로 배상할 것을 촉구했다. 셋째, 성결교회 부흥운동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결체험과 동시에 신유체험을 했고, 치유는 육체의 치유와 심령의 치유, 나아가 교회 갈등의 치유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넷째,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에는 재미있는 간증이 있었으며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있었다. 부흥사는 성경말씀만 전하지 않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간증자였으며, 부흥집회에는 악기를 동원한 찬양인도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데 좋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부흥운동 결과 한국성결교회는 3대 교단으로 부상하였고 1960~70년대 한국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성결교회 부흥운동의 새로운 도전>
성결교회 부흥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중복음의 현대적 재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 산업과 경제발전을 통해 더욱 현대화된 오늘에도 여전히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메시지는 복음의 핵심적 요소이다. 중생은 교회 안에 여전히 많은 명목상의 신자가 참 생명의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성결은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참된 부흥을 경험하고 내적인 죄의 회개와 삶의 실천을 통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유 역시 성결교회 부흥의 전통의 계승을 통해 육체와 정신의 온전한 치유가 일어나는 사회치유 운동이 요청되며, 재림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신앙으로 현세의 삶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이 요청된다.

이러한 성결부흥운동의 전통과 사중복음의 전통에 근거한 현대적 재해석과 적용을 기초로 우리는 초월적인 영성의 회복, 대중성의 확보,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 부흥사의 인격적 소양 등을 개발하여 성결 부흥운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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