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교회의 기둥으로 참된 효 실천

1933년 봄, 교회가 부흥되어 대지 80여 평을 매입하여 목조로 20여 평의 교회당 건물을 신축하고 진리교회의 간판을 걸었다. 진리교회는 목포 북교동교회의 이성봉 목사를 초청하여 여러 차례 부흥회를 열어 날로 부흥되었다.

1934년 2월 2일에 이성봉 목사의 집례로 이판일은 어머니를 비롯한 5명의 여자와 함께 세례 받고, 그날 세례 받은 5명의 여자와 함께 집사로 임명되었다. 1946년 7월에는 진리교회 최초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판일과 이판성 형제의 두 가정은 진리교회의 기초 신자였고 교회부흥의 밑거름이었다. 이판일은 일반 사회인들에게 실천적인 신앙과 희생적인 봉사로 존경받는 신자가 되었다. 그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다. 걸어올 수 없는 노인은 등에 업고 와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그는 주일에는 식수도 길어오지 않고 온가족이 예배와 교회봉사에만 전념했다.

마을사람이 바쁜 일철에 농기구를 빌리러 와도 박절하게 거절할 정도로 주일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에게는 자기 집안 일보다 교회가 우선이었다. 매일 교회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했다. 교회 초가지붕에 이엉을 손수 엮어서 얹은 후에야 찬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자기 집 지붕에 이엉을 엮어 얹었고 교회의 담벼락부터 바른 후에 자기네 담벼락을 바르곤 했다.

그들은 교역자 생활도 전담하다시피 했다. 자기 가족의 생활보다 먼저 교역자의 생활비가 우선이었다. 아침 일찍 우물물을 길어다가 교역자 사택의 물두멍에 식수를 채운 후에야 자기네 식수를 길었다. 교역자의 식량은 좋은 곡식을 골라 정성껏 자루에 담아가져왔다.

이판일은 교역자가 신학교 수업을 위해 상경하면서 교회를 돌보라는 당부를 받고 선한 목자처럼 신자들을 돌보며 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설교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저 함께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를 인도하며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다. 문 전도사가 6개월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판일의 노고를 크게 기뻐하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격려해주고 하나님께 축복을 간구해줬다.

당시 한국교회가 조상제례의식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금하자 기독교는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안중에 없는 불효막심한 오랑캐의 종교로 오인하였다. 이판일은 기독교야말로 부모를 진정으로 봉양하는 고도의 윤리적인 종교임을 행동으로 깨우쳐줬다. 그는 모친 생신마다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마을사람들을 초청했다.

온가족이 그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기원한 후 마을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잡수시지 못할 음식을 헛되게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살아생전에 산제사로 효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는 또한 초하루와 보름마다 어머니에게 ‘상식(上食)’을 올렸다. 상식은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의 하나로 사람이 죽으면 궤연을 만들어놓고 매일 아침저녁 혹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혼백에게 올리기 위해 궤연 앞에 차려놓는 음식이다. 그는 부모님 살아생전에 상식을 올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하면서 특별음식으로 어머니를 공양했다.

그는 홀어머니께서 외롭지 않도록 대화를 자주 나눴고 저녁에는 낮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드렸다. 아침 문안 인사와 밖에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마다 출입 인사를 했다. 벽장 속에는 과자 과일 곶감 등을 항상 준비해놓고 수시로 노모의 입에 넣어 드렸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을 본 자녀들은 밖에서 먹을 것이 생기면 할머니에게 드릴 것을 남겨가지고 오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