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9:1∼27)

손제운 목사(경기서지방∙안양중앙교회)
어리석은 어느 목사의 부끄러운 범죄로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솔직하게 저도 다를 것이 없는 목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어떤 변화가 필요한데 그것이 뭘까? 답을 찾았습니다.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때 추락한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바보라는 소리가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바보라는 뜻이 전혀 다르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랑과 존경, 감동을 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마치 바보처럼 인생을 살았습니다.

첫째, 권리가 있었지만 그것을 쓰지 않은 바보였습니다.
마땅히 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회와 성도로부터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께서 주신 권리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떠돌이 철학자들이 강연을 하고 돈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차별화 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는 바보가 될 때,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도록 그 권리를 쓰지 않는 바보가 될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바보였습니다.
바울은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실력이 있고,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혼구원. 그것이 바울이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영혼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종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도 없습니다. 영혼 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을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바보가 될 때,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사도였지만 두려움을 갖고 살았던 바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도 살린 사람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종말론적 긴장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운동장에서 상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달음질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바울이 두려워했다면 우리 역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안주하고, 안일함과 나태함 속에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지만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종말론적 긴장감을 갖고 사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입니다. 바울처럼 우리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더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바보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바보가 되는 것이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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