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6)

이동명 목사(충북지방∙함께하는교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가정이란 공동체에 소속 됩니다. 배움을 위해서 학교에 소속 되고, 일을 위해 일터에 소속됩니다.

우리는 함께 살지만 또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우리의 선택으로 하찮은 존재가 되기도 하고 혹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치고 빠지기를 잘하는 사람이 처세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유연하게 공감적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동료로, 리더로 평가받습니다.

수직 수평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정직보다는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효율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는 위장과 과장, 은폐가 더 효과적인 대응수단입니다.

진리보다 상황에 맞는 해석과 합리화가 훨씬 좋은 방식의 문제 해결능력이라고 평가받습니다.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 진리인 양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돌 직구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참 당황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 분은 늘 당당하셨고 한결같이 솔직하셨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늘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기로 한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데는 주춤하게 됩니다.

내가 죄 없는 예수님이 아닌 죄 많은 인간이라는 이유를 대며 우리는 정직과 진리를 선택하는 것을 망설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처럼 살기를 포기한 우리는 그 대신 정죄와 비난이란 감정 품기를 선택합니다. 표시 나지 않는 은밀한 선택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그 방식으로 나의 의로움과 우월함을 나만의 음지에서 펼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은밀한 선택도 차단해 버리셨으니 말입니다. 죄 없는 삶을 살면서 당당하게 정직하고 타협 없이 진리 위에 살든지, 아니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겸손하게 진리 위에 살든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경우의 수를 놓고 보니 답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죄 없는 삶을 살 수 없는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매일 매순간 회개하고 그분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에게 시시각각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 앞에 매순간 솟구치는 불평과 염려와 불순종과 불신의 죄를 내어놓고 씻음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지 몰라 죄의 어두운 영향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웃을 바라보며 정죄와 비난을 그치고 내게 임한 은혜가 그에게도 임하길 간절히 기도하며 그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 무거운 죄 짐을 값없이 벗은 사람은 절대로 누구도 포기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엄청난 힘을 경험해본 사람은 어떤 죄에도 조금도 움찔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의 사랑과 그 이름의 능력을 간증하는 사람은 죄 사함 받음의 기쁨과 감격 선포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직하고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빚진 자들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합니다. 누구도 혼자 두지 않습니다. 누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새로워진 자기 안에 예수 이름을 담고 ‘우리’ 안으로 주저 없이 뛰어듭니다. 복음으로 한 사람을 살리고 치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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