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훈 목사(대흥교회)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어리석고 무모한 자이거나 죽음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것이다. 생존본능이 사람 안에 있는 한 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정말 죽어야 할 자리에 이르게 된다면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할 자리에 맞닥뜨리면 도망치지 말고 죽어야 한다.

세월호의 선장 이모 씨는 가라앉는 배를 뒤로하고 제일 먼저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수백명의 생목숨이 수장되는 그 자리에서 탈선명령도 하지 않은 채 자신만 살겠다고 급히 속옷 차림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이 자기가 죽어야 할 자리인데도 말이다. 이제 그는 빠져나온 것이 천만다행이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라는 낙인 속에서 온 국민이 쏟아내는 공분을 느끼며 남은 세월을 살아야 한다. 산 것이 산 것이 아니다. 모든 국민의 마음속에서 그는 날마다 살해당하고 있다.

동일한 죄로 2012년 1월에 침몰한 이탈리아의 콩코르디아호 선장은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인데 검찰 측은 징역 2697년을 구형해 놓고 있는 상태다. 이들과는 반대로 남윤철 교사, 박지영 승무원, 양대홍 사무장 등은 그곳을 자신들의 죽어야 할 곳으로 여겼다.

웰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웰다잉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과연 죽어야 할 자리를 만나면 도망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생명을 요구받을 때 어떻게 처신하게 될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을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절실하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도 바로 죽을 자리에서 피하지 않고 죽음의 잔을 기꺼이 마실 힘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콜베는 폴란드 출신의 신부였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당하게 된 한 젊은 가장을 위해 자신이 대신 죽겠노라고 나섰다. ‘나는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는 가장입니다. 살려주세요’하며 소리치고 애원하는 가조브니첵을 위해 콜베 신부는 ‘나는 아내도 없고 자식들도 없습니다’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용기이다.

죽을 자리인지를 분별하는 은혜 또한 필요함을 깨닫는다. 네로 치하에서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로마를 벗어나 도망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그 유명한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후에 베드로는 로마 그곳이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임을 깨닫고 되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게 된다.(헝가리의 센케비치가 쓴 소설 ‘쿼바디스’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주동한 까닭에 투옥되어 고생하시던 주기철 목사가 며칠 풀려났을 때 주 목사의 부인이던 오정모 여사는 남편을 힐책하며 다시 감옥에 들어가 죽으라고 쏘아붙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오정모 여사나 주기철 목사는  주의 종이 죽어야 할 때임을 알았고 주의 종이 죽을 자리를 만났을 때 피하여 도망쳐서는 아니된다고 여긴 것이다. 

과연 내가 죽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를 늘 주님께 여쭙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살아야겠다. 아끼다가 허망하게 스러지는 일이 없어야겠기에 더욱 그렇다.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생명을 내던질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죽어야할 자리를 만났을 때 뒤로 물러가지 말게 하시고 기어이 주의 제단에 제물 되게 하옵소서. 의를 위해, 진리수호를 위해, 친구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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