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교회되게’하는 종교개혁주일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봉화가 올려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사상은 그로부터 약 250동안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점차 완성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의 젖줄이 되는 거대한 강을 이루었다.

그들 중 마르틴 루터의 ‘믿음으로 인한 의인(義認)’ 사상은 개신교를 낳는 효시였다. 1천년을 이어 온 중세교회의 사상은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와 도덕주의였다. 하나님께 이르는 이 3가지의 사닥다리를 루터가 던져버리고, 믿음(sola fide)과 성서(sola scriptura)와 은총(sola gratia)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닥다리를 제시함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점점 형성되었다. 이는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가는 길이었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1738년 4월 24일 요한 웨슬리의 중생과 함께 제시된 성화(聖化)사상은 개인구원의 완성 뿐 아니라,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봉사와 전도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사상이 완성될 수 있었다.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자들의 사상은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는 것보다 오직 ‘교회를 교회되게’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를 실현하기위한 온전한 헌신이었다.

특히 오늘의 우리사회와 교회는 웨슬리가 개혁하려던 사회상과 매우 흡사하다. 18세기의 영국사회를 지배한 사상은 저열했고, 스포츠라는 경기는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사생활은 물론 공중도덕생활이 부패했음에도 조금도 뉘우치지 않아 뻔뻔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고 해서,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누란의 위기’라고 정의했다.

당시 영국사회의 부패의 원인이 무엇일까? 신학자요 문명비평가인 폴 틸리히의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다’는 주장에 따라, 사회부패의 근저에는 당시 종교, 즉 개신교인 영국국교의 부패에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상황은 암흑기였다고 역사가들의 지탄을 받는 중세천년을 지배한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상과도 같은 맥락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영국사회의 부패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성직자들은 영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성례와 설교를 허례로 집행하는 직업수행자였고, 성직자들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천박했다.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영적인 감사나 감격스러움이 없이 형식으로 치우쳤고, 그들의 삶도 영성이 메말라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역사가들은 지적한다. 이 때 종교지도자들을 지배한 사상은 이신론(理神論)이었다.

오늘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양상과 흡사하다는데,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가 반이성적인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역사성과 섭리, 기적과 계시성을 부인하는 이성적(理性的) 목회관은 교회의 타락을 낳는 온상이다. 오늘의 교회설교에서 회개나 십자가의 설교를 들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우리 성결교회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제 루터보다 웨슬리의 개혁핵심인 성화사상으로 충만한 제2의 웨슬리가 되어, ‘교회를 교회되게’하는데 일조(一助)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