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이 끝내신다. 하나님이 역사를 끝내시는 시간이 바로 세상 종말이다. 오늘 이 시대는 종말로 치닫고 있다. 성경은 종말의 특징적 징조를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죄악과 부도덕의 어두운 밤이 깊은 것을 말하고 있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온다.

현대인들은 밤의 쾌락에 빠져있다. 무절제한 성적 방탕과 술에 취해 형편없이 비틀거리고 있다. 얼마 전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2010년을 기준으로 해서 음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15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즉 술로 인한 생산성 저하와 질병, 교통사고, 사망 등으로 손실이 매년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타락한 성생활이 만연하다. 기성세대의 타락상뿐만 아니라 이를 모방한 청소년들의 성적 타락은 극에 달하고 있다.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 현상이요, 폼페이 최후의 날과 같다. 또한 인간 정서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쟁투와 시기,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다. 돈 생기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시대, 도덕이 붕괴된 무서운 물질만능주의, 극단의 에고이즘이 판을 치는 밤의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현대사회를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한다. 이 어려운 사상을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간단한 의미는 ‘절대 진리’도 없고 ‘절대 가치’도 ‘절대 권위’도 부인하는 사상체계이다. 절대 진리를 부인하니 기독교 절대 신앙이 거부되고, 절대 권위가 없으니 기성 권위에 반항하고, 나아가 삶의 절대 기준이 없으니 자기 기분대로 한다.

특히 도덕적 상대주의는 경계해야 된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나타내주는 표현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따라서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를 따져서 내게 이익이 된다면 부도덕한 일도 스스럼없이 감행하고 누가 안된다고 말하면 ‘그럴 수도 있지 뭐’하며 대적한다. 이로 인해 특히 성윤리가 무너지고 동성연애도, 혼전 성관계도 용납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절대 진리는 반드시 있고, 삶의 절대 기준도 분명히 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 불변의 신앙적 진리요 또한 성경의 교훈은 삶의 절대 기준이다. 지금 이것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문제는 오늘의 기독교인이다. 불신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역사의 시작과 종말, 나아가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이야 무슨 짓거리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고 또 역사의 종말을 믿는 신앙인들조차 아무런 의식 없이 이 세대의 사상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인은 이 세대 사람들과 다르고 또한 삶이 달라야 될 것을 성경은 교훈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 앞에 우리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다른가? 삶의 목적이 다른가? 삶의 습관이나 태도에서 무슨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세상이 어두움이면 우리는 빛이다. 그런데 그 빛이 꺼지면 같은 어두움이 되고 만다. 기껏 다르다는 것이 주일에 교회 한 번 나오는 것 밖에 없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세대의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 종말이 임박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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