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시점은 4월 21일 저녁 9시 30분이다. 세월호 침몰 참사의 현재 상황이 이렇다. 탑승 476명, 구조 174명, 실종 215명, 사망 87명. 사고 엿새째인 오늘 선체 내부의 수색이 본격화되면서 하루에만 28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실종이 급속하게 사망으로 바뀌고 있다. 어제가 부활주일이었는데, 아마 거의 모든 교회에서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희생자와 실종자에 대한 무거운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설교자들도 어제처럼 주일 설교를 고민한 적이 없었으리라. 한국교회가 지켜온 부활주일 가운데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설교에서 이 사건을 피해갈 수는 없는데, 부활이란 주제와는 너무 대조적인 엄청난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이 사건에 대하여 설교단에서 ‘공적으로’ 무어라고 언급해야 하나 생각하며 며칠 동안 고민이 컸다.

지금 온 국민이 그 속에 깊이 빠져 있는 처절한 참사 한가운데서 사건에 대한 신앙적 해석은 난무하는 보도와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마음이 먹먹하고 실제로 가슴이 답답한 신체 증상까지 느껴지면서 기도는 간절했다.

부활주일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로 실종자 가운데 몇이 살아서 구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활의 날에도 희망의 소식은 침묵했다.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서 아주 유명한 ‘하나님의 침묵’이 무거운 돌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내리 눌렀다. 아프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절망하면서 기도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용서였다. 내가 누구를 또는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용서하시고, 살려주소서’ 하는 심정으로 사고 사흗날 이런 기도를 올렸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빛을 비추어 / 길을 찾게 하소서, / 산소를 주시어 / 숨길을 지켜 주소서

어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삶을 불쌍히 여기사 /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 끝까지 생존의 갈망을 부여잡게 / 그래서 용기를 주소서

이 시대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처절한 2014년 고난주간에 / 생의 갈망으로 서로 용서하며, / 절망을 넘는 희망으로 / 바닥 없는 이 고통을 넘게 하소서

주여, /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 생명줄과 지팡이로 인도하시고, / 선체 내부로 들어갈 길을 여시어 / 생명의 부활로 응답해 주소서

주여 제발, / 영원한 나라의 부활 전에 여기에서 / 아직 신체의 생명에 더 있게 하소서

부활의 날이 내일모레인데…”

계속해서 회개하며 용서를 빌어야 하리라. 적어도 참사의 수습이 일단락될 때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을 찢어야 하리라. 물론 사안에 대한 법적인 처리는 검찰과 경찰을 중심으로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이 공정하고 철저하게 집행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소 잃고라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쳐보는 일을 희생자 가족들의 피눈물을 생각하며 국회를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직책을 걸고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용서를 빌어야 할 때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모든 권력자와 어른들이 뼛속까지 이 나라의 탐욕을 회개해야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제가 믿는 신에게 용서를 빌고, 비종교인은 인륜과 양심에 용서를 빌고, 적어도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사람으로서 용서를 빌어야 한다. 며칠 동안 온 국민이 갑자기 깨달아버린 것처럼, 이 나라 국민으로 사는 사람 가운데 적어도 어른이라면 이 사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용서를 비는 시간이 우리를 치유할 것이다.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마음에서 새로운 눈이 뜨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용서받을 사람인 것을 깊이 자각하는 데서 어쩌면 평생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입은 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그분들을 배려하며 이 일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하게 참회하는 용기에서 사안을 무섭도록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법 집행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그 안에 계시다. 바닥 없는 절망 속에 스러져 가는 생명들을 끌어안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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