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다시 맞는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과 어둠, 비탄과 절망을 이기신 것이며, 생명의 부활로 우리에게 참 기쁨과 소망을 주신 것이다. 이 부활의 기쁨이 온 누리에, 모든 생명 안에 넘치길 기원한다.

부활의 기쁨을 온 누리에 퍼뜨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곧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부활절 예배나 칸타타 등 교회 내 잔치에 머무른다면 이것은 우리만의 기쁨일 뿐이다. 또 이웃에게 삶은 달걀을 전하는 것도 ‘오늘은 부활절'임을 알리는 행동일 뿐이다. 가능하다면 마을잔치같이 떡과 음료수도 나누고 문화행사도 열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다양한 축제의 장을 펼쳐야 한다. 한두 사람이라도 부활절로 기뻐한다면 그것이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부활의 기쁨을 가장 누리기 어려운 사람은 차별과 설움에 방치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어부와 세리, 창녀, 사마리아인 같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데 힘쓰셨다. 오히려 사회의 주도층인 제사장과 서기관, 로마 관료와 병사들에게는 멸시와 천대, 차별을 당하셨다. 그렇기에 그분의 부활은 사회의 약자에게는 기쁨이지만 사회 주도층에겐 두려움이었고, 숨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할 부활은 2000여 년 전 그랬듯 우리 사회 약자에게 기쁨이 되어야 한다. 대학 졸업 후 실업 상태에 있는 대학생,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퇴직한 실직자, 이혼 등 가정파탄으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한 부모 가정, 고독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홀몸노인, 돕는 손길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장애인과 장애인 시설,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과 외국인노동자들, 쪽방촌에서 홀로 살고 있는 외톨이 노숙자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 우리 교회는 이들에게 어떤 기쁨, 어떤 소망을 줄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의 참 뜻이 무엇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그들에게 주시는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며 힘써 찾아야 한다. 고난주간에 진행하는 특별새벽기도회나 성금요일 예배를 통해 기도하면서 어떤 기쁨, 어떤 소망을 전할 수 있는지 성찰하고, 하나님 앞에 결단해야 한다. 또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는 말로 회피하기보다 강도 만난 유대인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돌봤던 사마리아인처럼,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그 일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만나고, 방법을 깨닫고, 기쁨과 소망을 배우며 나누게 될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보다는 부유한 자, 가진 자들의 편이라는 비판에 시달린다. 사회의 비판에 ‘아니오'라고 답하기 어렵다. ‘무수한 봉사를 하고 있다'며 알리고 ‘가난한 자와 약자의 편에 선 교회'의 사례를 들어 변호할 수도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직접 그들의 곁에 내려가는 방법을 보이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행하심을 따라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부활의 기쁨을 전하고 나누는 데 힘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 방법을 깊이 성찰하고 묵상하는 교회,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느끼며 보듬고 상처를 싸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부활의 기쁨을 전하고 나누는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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