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왕가위 감독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경삼림’, ‘화양연화’와 2008년 재편집한 ‘동사서독 리덕스’의 한국 재개봉을 기념하기 위해서랍니다. 소설가 정이현은 90년대 학번으로 그 시대의 감성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왕가위 좋아해?’라는 질문이 ‘하나의 고유한 취향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된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또 “왕가위 영화는 풍요로운 성장기의 최대 수혜자로 욕망을 당당히 드러내고 이념에 대한 강박이나 전쟁공포가 없었던 당시 세대에게 하나의 바이블 같았다”라고 평가했더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의 작품 중 한 편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모 신문과의 인터뷰 기사 중 한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당신의 영화는) 보고 나면 뭔가 개운치 않을 때가 많다. 해피엔딩도 없고.” 그가 대답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해피엔딩이란 극이 끝났을 때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주인공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결말을 뜻하는가? 난 그것만이 해피엔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건 어떻게 보면 만들어진 가짜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인생이 과연 그런가? 난 자아를 찾고 과거를 극복하고 내가 완벽하진 않지만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 해피엔딩이라 생각한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단걸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단걸 싫어한다. 싱거운 게 좋다. 담담한 맛을 좋아한다. 담담한 것이 입에서 오래간다.”

기사에 따르면 왕가위는 통속적 해피엔딩은 실상 가짜(허구)이고 세인들이 비극적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작품세계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해피엔딩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그는 기존의 해피엔딩과 비극의 정의를 해체하고 해피엔딩과 비극이란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부연한다면 모든 인생이란 그 자체가 각자에게 고유한(절대적인) 과정일 뿐 어느 누구도 통속적 ‘해피엔딩과 비극’이라는 잣대로 그것을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가위의 해피엔딩론은 얼핏 젊은 니체의 비극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의 인간 이해가 이상하리만치 닮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본질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규명하고 자신을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비극이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플라톤적인 것’으로 억압하며 배제한 것으로 이해했고 그러기에 규범적 서구 형이상학을 허구로 또 그 연장선상에서 ‘기독교를 삶에 대한 근본적인 구토이자 권태’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삶이란 인간의 ‘욕망과 운명’입니다. 니체적으로 말한다면 ‘욕망과 운명’이야말로 ‘규범화된 인간’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목양자인 저는 “종교는 결국 인간 비극의 끝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그 비극의 끝에서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편에 서 있고 싶습니다. 간혹 왕가위처럼 ‘비극의 미학’을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비(悲)’가 다행히 ‘극(劇)’이니 ‘비극미(美)’를 ‘학(學)’으로, 때로는 ‘예(藝)’로 ‘논(論)’하는 것이지 ‘悲’가 현실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悲’를 ‘아름답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비극의 미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Poetica)’에서 적시한 것처럼 ‘비극의 카타르시스’라는 사태의 다른 이름(異名)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모진 황사 속에서도 봄꽃은 필 테고 종교가 인간 비극을 넘은 구원의 출구를 제시하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지만 그래도 남은 자들의 각성은 이어지겠지요. 나는 아직도 통속적 의미에서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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