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 전입과 총회본부 근무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태백산 밑 황지로 피신했다. 얼마 후 인천상륙으로 국군이 북진을 하면서 고향으로 갈 기회를 찾기 위해 혼자 서울로 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진행되고 그는 가족에게 가지 못한 채 피난민의 대열에 밀려 부산을 향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이끌고 경북 영주까지 피난을 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통해 연락이 닿았고 그는 가족을 만나 함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어려운 피난생활 중에 그는 조선제분회사에 취직하였으며 그곳에서 고향 목사님을 만나 함께 용주동장로교회를 개척, 집사와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그는 나이 32세이던 1954년 11월에 장로로 장립되었으나 교회의 터가 공원부지여서 헐리는 바람에 신자들이 아무 대책 없이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집에서 가까운 수정동성결교회에 1956년부터 출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장로교회를 다녔고, 또 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는 등 전형적인 장로교인이었다.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성결교회의 황성주 목사의 설교가 매우 은혜스러웠고, 성도들이 기도에 열심을 내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은혜로운 성결교회를 통해 피난생활의 고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1958년 봄에 이성봉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철저히 회개하고 중생을 체험하고 보니, 성결교회처럼 좋은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열심히 주일학교를 자원해서 맡아 충성하여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되었다.

그는 1958년에 수정동교회 장로에 취임하여 이제 완전한 성결교회 장로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주일학교 부장직과 청년회의 지도위원으로 청년들을 데리고 기도하며 호호방문전도와 네거리에서 노방전도 등 전도활동을 열심히 하여 교회부흥에 기여했다.

1962년 5월의 총회에서 부산수정동교회 이정백 담임목사가 총회본부의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정백 목사는 필체가 뛰어나고, 서무행정을 빈틈없이 잘 하는 임용희 장로가 자기 옆에서 도와주면 총회업무를 잘 할 수 있다면서 그에게 서울에 함께 올라가자고 권면했다.

기도를 해보겠다고 말한 후,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어떤 확신이 생겨 결단을 했다. 임용희 장로는 이정백 목사의 권면에 따라 부산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가 총회본부의 행정서기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성결교회의 교세는 약 4백여 교회였고, 전쟁으로 핍절한 경제 때문에 총회본부의 재정도 열악하여 총회본부 직원이 총무, 서기, 사무원 3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라는 믿음으로 생활고를 극복하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가 총회본부에서 일을 시작하던 1962년부터 약 10년간은 우리 국가의 경제가 몹시 어려운 시절이어서 따라서 교회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총회본부 또한 각 지방회가 어려워 총회비를 제 때에 납부하지 않아 본부직원들의 봉급이 제달에 지급될 때가 드물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내색을 전혀하지 않고 늘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을 편하게 대했음으로 사람들은 총회본부의 어려움을 모를 지경이었다.

당시 교회개척이나 건축 중에 재정이 없어 교역자들이 총회본부에 와서 울며 호소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딱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그와 절친한 경제력 있는 장로들에게 호소하여 얼마간 도움을 주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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