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폭력배를 미화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무식하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의리 하나에 죽고 사는 조폭들의 인간성을 제법 그럴듯하게 그렸습니다.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어야 할 종교, 교육, 정치계의 인사들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사회전반에 대한 불만이 퍼져 있었던 때에 조폭들의 세계가 오히려 더 멋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호랑이나 용의 문신으로 온몸을 장식한 폭력배 중 한 사람의 건장한 팔뚝에 철자법도 맞지 않는 ‘차카게 살자’라는 문구의 문신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어떤 이는 재미로, 어떤 이는 패러디로, 때론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다양하게 입에 오르내리며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지워지지 않는 문신의 교훈이 조폭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조폭들 여전히 나와바리(繩張·자기의 영역)를 지키고 확장시키는 일이 존재의 목적이고 그 일을 위해서는 어떤 폭력이나 파괴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리란 두목에게 종속되어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비인간적 규율에 불과합니다. 조폭을 아무리 미화시켜도 그들은 여전히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이기적 폭력집단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조소로 교회용어를 비틀어 사용하는 일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이름을 ‘개독’이라 하고 목사를 가리켜 ‘먹사’라고 하지를 않나, 복음전도보다 교세 확장에 열을 올리는 교회의 행태를 조폭의 ‘나와바리’ 싸움이나 교회 세습을 ‘영역 상속’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부정적 비판은 터무니없는 모략이라기보다 교회 스스로 자초한 면이 더 큽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내용과 실제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괴리가 심하고 부도덕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밖에서의 삶이 표리부동한 신자들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기록이 아무리 진리이며 예배의 순서가 감동적이고 목사의 설교가 철학적이어도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크고 멋진 예배당과 카페와 복지 문화시설 등 다양한 기능의 부속건물, 기도원에 묘지까지, 목회자들의 고학력과 기본적으로 가진 한 두 개의 학위,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청탁방문을 할 만큼 높아진 위상과 영향력, 많은 숫자의 출석교인,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정,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릴 만한 출판물의 범람. 이제 한국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행 3:6)을 하기 쑥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라는 말도 하기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회적 불신과 비판에 직면한 한국교회의 문제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바라는 것은 올바른 교리체계를 세워 나가는 신학이 아닙니다. 시처럼 아름다운 설교가 아닙니다. 멋진 카피(copy)와 같은 사명선언(mission)이 아닙니다. 올바르고 아름답고 멋진 삶입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 생선의 맛을 내게 하고 고기가 제맛을 내게 합니다. 빛은 연소되는 불꽃이 아니라 빛을 받는 사물을 드러나게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마 5:16). 말로만 ‘차카게’가 아니라 나를 희생하여 남이 행복하도록 ‘착하게 살자’라는 것이죠.

새해에는 ‘차칸 교리’가 아닌 ‘착한 윤리’, 차칸 설교가 아닌 착한 목사, 차칸 구호가 아닌 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