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선비들은 이 글을 꼭 써야 할 것인가, 이 말을 꼭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깊이 고뇌하였다. 고려말의 목은 이색(1328~1396)에게 글 쓰는 법을 누가 물었다.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을 반드시 말하고 반드시 써야 할 자료를 반드시 쓸 것이니 이뿐이다.” 이어서 목은은 다음의 말을 추가했다. “말할 것이라고 꼭 말하지 말고 쓸 것이라고 꼭 쓰지 않는 것 또한 참됨이 아니겠는가”

▨… 이 시대의 ‘행동하는 작가’로 첫 손에 꼽히는 황석영이 ‘어둠의 자식들’(이동철 구술)을 쓰면서 스스로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나는 이 기록을 정리하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고 글을 쓰기도 부끄러웠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이, 삶의 기록이 이러할진대 과연 소설가란 무엇하자는 작자들인가 자신에게 되물어보고는 하였다. 사방에서 그런 이들이 입을 모아서 ‘문예 많이 해처먹어라!’라고 질타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 중앙정보부가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시절 글을 쓰는 이들은 행간마다에 의미를 감추며 다만 얼마라도 진실을 전하려 노력했었다. 그럼에도 저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네가 기자냐’라는 질타를 들어야 했었고 “그 우회의 화법마저 더러는 바람앞에서 줄기가 끊기고 잎이 떨어지는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야”(김중배·민초여 새벽이 열린다)했었다.

▨… 세상이 이렇게 달라진 것인가. 의미를 행간에 감추며 그래도 반드시 써야 할 자료를 반드시 쓰려고, 목숨이나 다름없는 일터를 쫓겨나면서까지 글쓰기를 감수했던 사람들을 ‘남산의 지하실’에서 족쳤던 그 권세는 어디로 가고 자신들이 단 인터넷의 댓글 몇줄에 국정조사를 받는 처지로 떨어지다니…이제는 굳이 행간에 의미를 감추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다.

▨… 1948년 유엔 총회는 ‘정보의 자유는 기본적 자유의 하나이고 자유롭고 적절한 정보는 모든 자유의 초석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교단 안의 활자매체, 인터넷 매체들이 활발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정보의 다양화는 교단이 권위주의, 획일주의에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글들이 난무해서, 또 다른 의미에서 ‘네가 기자냐?’라는 힐난을 받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서울신대 총장 인준 건에 대한 일부의 보도가 너무 서글퍼서 늘어놓은 넋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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