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송교회의 건축 이야기

정 집사는 마을 뒤에 자리한 야트막한 야산 땅을 임대하여 도지(賭地)를 주기로 하고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당시는 6·25 전쟁으로 강산이 초토화되고 경제사정이 피폐하여 개척교회 건축이 쉽지 않았다. 자재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급적 건축비를 절감하여 교회를 건축해나갔다.

십자군 전도대원 가운데 이영계 집사와 오종석 집사는 목수였는데 그들에 의해 시공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건축의 재료와 비용에 대한 재정적인 충당은 정 집사의 몫이었다. 남편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많은 외조를 해주었다. 재정장부를 정리해주고 물자와 재정조달에 자문을 해주었고 정 집사가 교회를 위해 밖으로 동분서주할 때에는 안살림까지 맡아 주었다.

교역자를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정 집사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들이 예배를 인도했다. 당시 건축재료 값이 비싼 때였다. 건물기초를 다질 돌을 냇가에서 모아 운임을 지불하고 마차에 서너 차례 실어 왔으나 돌과 자갈이 태부족이어서 며칠 동안 이른 아침과 저녁으로 어린이를 비롯한 온 성도가 동원되어 모래와 자갈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와서 교회의 기초를 다졌다.

흙벽돌을 찍어서 돌로 다진 기초 위에 교회의 벽을 쌓아올리는 공법을 썼다. 흙벽돌은 진흙을 적절히 반죽을 하여 널판지로 만든 틀에 흙을 다져 넣고 뽑아내어 그늘에 말려서 만든 벽돌이었다. 당시에는 마루를 깔 널판지도 구하기 어렵고 고가였다.

탄약이나 포탄의 나무 상자를 이어서 만든 널판지로 교회당 마루를 깔았다. 정 집사는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40여 리나 되는 직산(稷山)의 미군부대근방에서 값이 저렴한 포탄을 넣어 두었던 나무상자를 구입하여 교회당 마루를 깔았다.

유리가 귀했던 당시에 대용유리라는 것이 있었다. 가느다란 철사로 엮은 방충망에 지금의 비닐과 비슷한 운모를 씌운 것인데 반투명체로서 연필이나 성냥개비로 누르면 구멍이 뻥뻥 뚫렸다. 역시 경비의 절감을 위해 이런 대용 유리로 창문을 달았다.

그리고 지붕은 깡통함석으로 씌웠다. 미군부대에서 버린 각종 깡통들로 모자이크처럼 형형색색 현란하게 이어진 함석이었다. 천안의 건축재료 상회에서 구입해 와서 지붕을 덮었다. 콜타를 사서 청년들이 깡통지붕에 녹이 슬지 않도록 지붕에 올라가 입혔다. 포탄의 탄피를 매달아 종으로 사용했다. 주일예배와 삼일예배시간 그리고 새벽기도시간마다 울려주는 종소리는 마을의 부지런한 농민들에게 새벽을 깨우는 마을공용시계의 역할도 해주었다.

이렇게 지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소낙비가 쏟아지는 때에는 깡통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나 요란해서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에는 설교를 일단 중지하고 비가 끝일 때까지 목청껏 찬송을 불렀다. 참으로 뜨거운 교회였다.

가송교회를 이끌어 가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약 2km 밖에 있는 미죽교회나 소정교회와 통합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대다수 성도들은 그 제안에 찬성하지 않고 오랫동안 미자립교회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 가송교회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았고 목사와 사모, 장로와 권사 집사 등 많은 일꾼들이 배출되었다.

2011년 5월 22일에 새 성전입당예배와 임직예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대지 693㎡(113평), 2층 벽돌 건물로 130석 예배본당과 작은 예배실, 사택 등을 건축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정 집사는 1964년 그의 생일날인 음력 7월 28일(양력 9월 4일)에 서울 정릉 작은아들 집에서 생일상을 받고 그날 저녁에 손자의 재롱을 보고 즐기시다가 돌연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68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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