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환 전도사 
(서울남지방 · 우리가본교회)

‘코로나(COVID-19)’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모두의 탄성같이, 그건 정말 극복할 수 없는 시대를 닮은 ‘절대정신’이겠는가. 점으로 이루어졌고, 선으로 이루어졌고, 면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우리 시대의 공허와 굶주림을 읽어냈다. 합리적인 문법으로 서로를 거리 두게 하고, 정당하게 서로를 미워하게 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혐오하게 했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그것은 젓가락 행진곡을 닮아 있더라.

교회의 풍경은 더욱 아득하다. 품격 있었던 교회의 질서들은, 슬픔에 졌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 뜻’이니, ‘사탄의 짓’이니, ‘죄의 결과니’ 하는 쟁론들이다. 들을수록 굉음이 나는 대화들은, 모든 이들을 마르게 하였다. 마치 홍수가 나면, 사방에 물이 터져 나오지만, 정작 마실 수 있는 생수가 없듯이 말이다. 시대에 대안을 주었던 교회는, 생존에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교회로 모일수록 더 전염만 되니, 사역자로서 우리는 너무 슬펐다.

그런 설익은 시대의 익살스러움 속에, 2020년 8월 우리는 교회를 개척했다. 나의 신분은 전도사였고, 나와 함께 했던 4명의 사람들은 색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모습은 평범했고, 얼굴은 덤덤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한 가지 지점을 주옥같이 믿고 있었다. 그건 여전히 우리 시대에 가장 정확한 답은 ‘교회’라는 고백이다. 그렇기에 교회 이름을 ‘우.리.가.본.교회’라고 지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배웠고, 그리워하는 교회를, 이 땅에 다시 부활시키자는 고백이었다. 결기 있는 그날의 탄성은 여전히 생생하다.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마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놀이 같은 질문이었다. 시대의 과제는, 움직이는 것보다 멈춰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의 끝을 따라가 보니, 결국 이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로 치환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읽은 성경과 나를 읽은 성경은, 예언자같이 어떤 대답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공동체성’이었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언제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을 돈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힘으로 해결하지도 않았다. 더 나아가 합리성을 가진 악수로 승부를 보지 않았다. 교회는 그 모든 어려움을 오직 ‘공동체성’으로만 이겨나갔다. 그것은 점과 선과 면으로 사방이 확실하게 막힌 ‘코로나’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교회의 ‘공동체성’이란 무엇일까? 그걸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도해본다면, ‘예수의 인격과 의식의 탄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땅의 수많은 모임과 교회 공동체성의 구분 점은 여기에 있겠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예수의 인격과 의식의 탄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 같은 고정성이 아니라, 바람과 같은 유연성이며, 어린아이 같은 순수성이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는 ‘예수의 인격과 의식의 탄생’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유연한 대안성을 가졌다. 

 

대안1. 예배 시간 _ 오후 3시 
당시 코로나가 절정이었을 때, 교회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다. 이 혐오는 예배 자체에 대한 혐오까지 번져나갔다. 마치 교회의 예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코로나가 퍼진 것 같이 말이다. 조국교회는 이 모든 오해를 받아야 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지금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 이런 위기를 역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물론 온라인 예배가 대안처럼 떠올랐지만, 개척교회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대안일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나온 생각은, 예배 시간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다. 예배 시간은 오후 3시였다.

당시 코로나는 호흡기 감염이 주된 원인 이었다. 만약 오후 3시에 예배를 드리면, 마스크를 벗을 일이 일체 없게 된다. 그 이유는 모두 3시 전에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많은 성도들이 ‘11시 예배’를 핑계로, 가족과의 시간을 소홀히 하거나, 주일에 늦잠을 잘 수 없는데, 그 모든 것들을 완화해 주었다. 물론 어색했지만, 막상 이것을 해보니 성과가 좋았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우리는 만족도가 높았다. 더불어 아무도 예배에 지각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에서 식사와 커피로 인해 마스크를 벗을 일도 없으니 안전했다.

대안 2. ‘몰기도’_ 매일 저녁 10시 기도회 
모두가 알겠지만, 당시에는 교회에서 모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표면적인 예배의 여부와 성도의 교제의 유무도 그렇지만, 기도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교회는 기도를 멈춘 적이 없다. 그러나 기도 역시 호흡기 감염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본교회는 <몰기도>를 만들었다. 몰기도는 ‘몰아서기도 하기’의 줄임말이다. 매일 저녁 10시에 카톡에 모여서 기도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금방 적응했다. 저녁 10시만 되면, 모든 성도들이 카톡방에서 ‘기도합시다’를 외친다. 그리고 각자의 기도 제목을 나눈다. 그 후엔 당장 그 자리에서 모두 기도를 한다. 월-토요일까지, 주6일 매일 저녁 10시 모두 몰아서 기도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정신을 닮은 공동체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대안 3. ‘맛없집’ _ 선교적 식사 
교회는 확실히 입을 벌려야 하는 공동체이다. 설교, 찬양, 대화, 커피까지 모두 입을 벌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입 벌림의 영역은 ‘식사’이다. 모든 교회는 매주 식사한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서 이 모든 것들이 금기가 되었다. 식사를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성도의 교제는 무너져 갔다. 우리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연구 끝에 대안을 찾았다. 그것은 교회에서 식사를 ‘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식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교회의 식사 예산은 언제나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서, 이 식사 예산을 남겨 놓는 것이 그리 지혜롭다고 판단이 들지 않았다. 항상 사용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대안을 생각한 것은 교회는 성도를 위해서 식사를 구매하고, 그것을 집으로 갈 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선교적’ 의미를 덧붙였다. 그것은 성도들이 사는 동네에서, 코로나로 인해서, 가장 장사가 안되고, 맛없어서 장사가 안되고, 위치가 좋지 않아서 장사가 안되는 곳에서, 교회의 식사 및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의 식사 예산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면, 코로나는 교회의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모두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성도들에게 교회의 ‘공공적 가치와 의식’이라고 가르쳤다.

이건 확실히 재미있었다. 왜냐면, 정말 맛이 없는 먹거리들 때문이다. 어떤 음식들은 허탈한 웃음마저 나온다. 웬만하면 맛있는 간식들도 정말 맛이 없었다. 장사가 안되는 집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맛없집’을 하면서, 오히려 그분들의 마음을 더 헤아릴 수 있었고, 예수의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대안 4. 원정 예배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예배의 모양들이 축소되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뭐랄까, 마치 교회가 패배한 것 같고, 실패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더 나아가 눈치까지 보게 되는 굴욕의 감정이 생긴다. 이대로만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원정 예배’이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교회, 더 나아가 서울보단 지방으로, 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계획상 의도는 좋지만, 어떤 사역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좋지 못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계획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박’이었다. 
코로나 극복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강원도 춘천, 전라북도 군산, 진안, 등등으로 원정 예배를 갔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 걷고 있는 교회가 있다라고, 모든 순서에 서로는 우리가 되었다. ‘함께’라는 의식에 우리는 서로에게 촉촉한 위로를 받았다.

 

대안 5. 국내 단기선교
조국교회는 코로나로 인해서 해외 선교를 가는 것이 중지되었다. 우리 교회는 개척교회지만, 선교에 관심이 많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다. 
교회의 1년 결산 금액이 2,300만 원인데, 그중 600만 원을 선교비로 사용할 만큼 선교에 적극적이다. 누구나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듯, 우리도 그렇다. 내년엔 선교를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선택한 것은 ‘국내 단기선교’이다. 우리는 ‘전라북도 진안’으로 국내 단기선교를 떠났다. 진안으로 가서, ‘옥토성결교회’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개복숭아밭을 수확했다. 
3박 4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1,000평이 넘는 곳의 밭을 수확했다. 그 밭은 뇌출혈로 쓰러지신 분, 기력이 쇠하신 분, 또 이런저런 이유로 수확할 수 없는 분들의 밭이었다. 코로나 기간 중 우리 교회에 있어서, 국내 단기 선교는 하나의 시그니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정신을 닮은 공동체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대안 6. 공유 교회 _ 주님의 교회(황호성 목사/강시아 사모)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거의 끝나갈 때쯤, 우리의 관심은 다시 ‘교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관심은 ‘우리 교회’가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교회’이다. 개척해서 그런가, 개척을 준비하는 교회에 마음이 많이 간다. 우리 교회 예배 시간은 오후 3시이다. 그렇기에 일반 교회에서 가장 주요한 시간으로 쓰는 오전 7시, 9시, 11시가 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 장소를 다른 교회에 ‘공유’하기로 했다.

공유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이로 인해 어떤 금전적 이득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SNS에 이러한 내용을 올리니, 3일 만에 11개 교회가 지원했다. 모든 교회를 심사했고, 결국 ‘주님의 교회(황호성 목사/강시아 사모)’를 선택했다. 이분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관계다. 그러나 이 교회를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교회로서 가장 강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 가장 좋은 시간을 주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동안 개척을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부터, 이런저런 핵심 가치들을 공유한다. 물론, 이로 인해 분명 이런저런 불편한 것들이 생긴다. 그러나 더 크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귀한 교회가 설립되는 것이다. 이 땅에 이것만큼 큰 가치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같은 개척교회가 누군가의 곁이 되어준다는 사실에 감격이 있다. 더 나아가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교회가 움츠러들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정신이 탄생하는 공동체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가 지나온 소소한 길들이다. 물론 우리가 걸어온 여정이, 코로나에 대한 절대적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코로나 시간에 ‘예수의 인격과 정신이 탄생하는 공동체성’이 아름답게 탄성을 지르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주셨다. 개척 초기에 4~6명이었는데, 3년이 지난 우리는 40~50명이 예배를 드린다. 공유교회의 인원까지 합산한다면 70~80명이 예배를 드린다. 코로나시기에 이런 부흥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교회를 꿈꾼다. 여전히 유효한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그건 앞으로 가야 할 길만 고민하는 ‘앞걸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는 ‘뒷걸음’이다. 어떤 시인의 고백처럼, 눈 내린 야산에는 눈을 밟은 뒷걸음으로 앞길을 찾는 법이다. 우리는 ‘교회’와 ‘개척’이라는 눈 내린 야산을 걷는 중이다. 그러니 앞걸음보단 뒷걸음에 신경 쓰는 교회가 되겠다. 그것이 성경에서 우리가 본 교회의 모습이니까. 우리의 신앙은 선지자처럼 비범해질 수 있고, 선지자의 신앙은 우리처럼 괴로워했었다. 여기서, 지금, 우린 교회를 꿈꾼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