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최초 성결교회…미래 중심으로 도약

1921년 설립된 부강교회는 지난 100년 간 충북 지역의 모교회 역할을 감당해왔다.
1921년 설립된 부강교회는 지난 100년 간 충북 지역의 모교회 역할을 감당해왔다.

오래전부터 세종시 부강면은 충청북도의 관문이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설되면서 부강역이 생겼고, 금강과 미호천을 잇는 백천천은 뱃길이 닿는 곳으로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도 부강면은 세종특별자치시로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경부선,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 등이 지나고, 부강역과 부강공단, 중부권 복합물류터미널 등 교통·물류의 중심지이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부강교회(송영규 목사)가 세워진 것은 1921년이었다.  부강교회는 지난 100년 간 충북 지역 최초의 성결교회로 신앙의 어머니 역할을 감당해왔다. 오랜 역사를 거치는동안 모진 풍파도 겪었지만 부강교회는 지역의 모교회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꿋꿋하게 잇고 있다.

개척자 여메리 전도사.
개척자 여메리 전도사.

 

여성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

부강교회는 1921년 우리나라 개화기의 여성 운동가이자 이화학당 제1회 졸업생이었던 여메리 전도사가 세운 곳이다. 여메리 전도사는 남편 양홍묵 씨가  사망 후 남편의 고향인 부강에 돌아와  살게 되면서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삼아 주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녀의 전도로 50~60명에 달하는 인원이 모이자 대전지방회에서 이같은 소식을 듣고 1921년 9월 곽재근 전도사를 파송, 여 전도사의 집에 모여 부강교회를 설립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 설립 후 성도들의 뜨거운 신앙 열정으로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특히 1925년에는 첫 어린이 부흥회를 열었는데 이때 많은 학생들이 은혜를 받아 큰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장년 부흥회를 연 부강교회는 당시 1,000원의 건축헌금을 모아 첫 예배당 건축까지 이루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또한 부강교회는 죽전리교회(1924년), 조치원교회(1925년), 시동교회(1929년) 등을 개척하면서 지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흘러보내는 모교회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도 부강면에는 총 7개 교회가 있는데 모두 부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교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중 부강교회는 여전히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중심교회의 역할을 감당 하고 있다.

갈등과 고통 보듬어

예로부터 부자와 지식층이 많았던 부강면은 한국 역사 속에서 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불의에 맞서 일어선 사람들도 많았으며 때로는 지역 자체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큰 상처와 고난을 겪을 때도 있었다. 특히 6.25전쟁 당시 지역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면서 갈등이 심했고 서로를 비방하면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또한 1960년대에는 당시 한화공장이 생기면서 원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도 심했다. 새롭게 유입된 이주민들과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원주민들 사이에서 신경전이 심했고, 이런 갈등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급기야는 한참 부흥하던 교회도 성장을 멈췄다.

이렇게 이념과 세상의 가치로 주민들이 갈등하며 아파하고 있을 때 이들을 품은 곳은 바로 부강교회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로 갈등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고 섬기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세워간 것이다. 이런 갈등의 중재자가 된 부강교회는 이후 많은 발전과 성장을 이룩했다.

토스트 전도활동.
토스트 전도활동.

교단 지도자들도 배출

오래된 역사만큼 우리 교단에서 사역하는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 대표를 배출하기도 했다. 특히 김창환 원로목사(선화동교회·전 총회장)와 오영필 목사(아현교회), 그리고 임창호 장로(중앙교회)는 교단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다.

특히 임창호 장로는 부강교회 부흥과 성장에서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다. 임 장로는 1920년 여메리 전도사의 전도로 부강교회 주일학교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사업가로 성장한 그는 1965년 고향인 부강지역의 경제발전을 위해 대한플라스틱공업주식회사(현 한화종합화학)를 세웠고 1967년 부강교회를 건축해 봉헌까지 한 인물이다.

특히 임 장로는 직원들에게도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 회사에 출근한 것으로 인정하는 등 젊은 직원들을 교회에 많이 나오게 하면서 부강교회도 급속도로 성장했다. 부강교회는 여메리 전도사와 임창호 장로를 기억하는 공덕비를 세워 교회 설립과 부흥에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의 헌신을 기억하고 있다.

가정예배.
가정예배.

지역 섬기며 함께 성장

비록 과거에 비해 많은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  인구 수가 6,0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지역이 되었지만 지금도 부강교회는 소소하게 지역을 섬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중단되었지만 오랫동안 매주 수요일이면 주변의 물류센터를 출입하는 화물차 기사들에게 토스트를 전달했다. 오후 12시부터 1시까지 한시간만 진행되는 토스트 전도이지만 500~600개가 나갈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지역의 어린이를 위한 작은 도서관도 운영했다. 책은 학교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부강교회는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 놀이터 역할도 감당했다. 아이들이 와서 책을 보면서 뛰어노는 동안 어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본당 옆에는 놀이시설을 설치해 언제든지 와서 놀 수 있도록 했고 여름이면 작은 수영장을 설치해 물놀이도 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해 코로나가 확산될 당시에는 마스크도 지역에 많이 나눴으며 인도네시아에도 2,000장을 보내 선교활동을 돕기도 했다. 여교역자들이 은퇴 후 생활하는 성락원도 일년이면 두 번씩 방문해 작은 섬김을 실천했다.

올해 2월 선교사 파송식.
올해 2월 선교사 파송식.

100년 역사 기억하며 미래 비전 준비

올해 100주년을 맞은 부강교회는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먼저 부강교회는 지난 역사를 정리하는 100년사 집필을 시작했다. 2014년 100주년 역사를 발간했지만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박문수 박사(서울신대)가 집필 중인「부강교회 100년사」에는 1920년대 교회 창립기부터 시작해 2000년대까지의 교회 역사가 게재될 예정이다.

새로운 100년을 예비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첫 번째는 선교이다. 올해 2월 부강교회는 인도네시아 이기호 서채린 선교사를 파송하며 선교센터 건축비로 1억원을 지원했다. 선교비는 성도들이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씨앗헌금으로 마련했다. 또한 몽골에도 선교센터를 건축한다는 비전을 갖고 몽골에 대한 후원도 준비 중이다.

두 번째는 서울신대 지원이다. 신학생 양성을 위해 매년 100만원의 장학금을 보내고 신대원 전액장학금에도 동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도시 교회에서 보내는 장학금 보다 금액은 적을 수 있지만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교단의 미래를 위해 큰 결심을 내린 것이다.

이 밖에 성경필사를 통해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신앙 열정을 되새긴다는 계획도 세웠다. 송영규 목사는 “100년의 역사 위에 향후 100년을 위한 초석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전교인과 함께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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