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한국성결교회의 실무 맡아

이상철은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교단 요직의 실무를 맡아 일했다. 1923년 ‘활천’ 창간에 관여하였는데 사장 길보른 총리의 권유로 주필 이명직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창간준비에 몰두했다. 그는 ‘활천’의 체제, 기사, 독자모집 및 경리방침, 인쇄소 선택, 제3종 우편물인가, 진체구좌 설정 등의 업무를 사실상 담당하여 업무를 수행했으며 성서학원 교수로도 봉직했다.

그는 1926년에는 성서학원 대강당구령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교단의 영적지도자의 반열에 오른다. 1927년 5월부터는 편집사무와 서무를 겸임하여 보다가 편집사무만 주력하기로 했으며 1928년에는 ‘활천’ 편집부장으로 임명되고 성서학원 교수로 봉직하면서 교단의 재무실무책임자, 동양선교회기부금 실무, 성서학원 서기, 사감, 중앙사무국 재무과주임, 출판과 편집주임, 기관지 ‘활천’ 편집부장 등 6종의 교단 중요 업무를 한 몸에 지니며 막중한 실무들을 총괄했다. 

1930년 초기에는 이사국 직원, 문서부 주임, 학무부 주임 겸 새로운 ‘비서’ 직분을 맡음으로써 교단과 이사회와 선교부의 교량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사료된다. 당시 ‘활천’ 직원은 허인수(발행인), 이명직(주필), 우드쓰(선교사), 길보륜(전 사장), 곽재근(촉탁), 최석모(촉탁), 최영택(교단출판부주임), 이상철(편집주무), 이건(본지촉탁) 등이었다. 그만큼 이상철은 중요한 직책을 감당했던 것이다.

1930년 12월부터 이상철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창신동, 철원, 홍성, 청주, 조치원교회 등 경향 각지를 순회했다. 또한 1932년 4월에 개최된 제4회 연회 겸 심령수양회에 준비기도와 환영회를 인도했으며 연회의 서기로 선출되어 이명직 목사의 뒤를 잇는 교단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상철은 그해 제4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설교, 사설, 강해 논설 등을 ‘활천’에 게재하여 그가 한국 교계의 거두들과 함께 ‘활천’ 집필진의 반열에 있었다. 1933년 5월에는 이사국의 회계업무를 맡았는데 4~5개의 중임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10월에 6~7년간 ‘활천’ 촉탁으로 수고한 이건 목사에게 편집업무를 인계하였다.

1934년 이상철 목사는 건강의 악화로 이사국 회계를 사임했다. 그의 건강악화 원인은 독립운동 당시 고향의 창고에서 은거생활 할 때에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폐병에 전염되었거나 경성성서학원 졸업 후에 교단의 실무 수행 과정의 과로로 인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 목사는 퇴원 후 자택에서 정양이 필요했지만 교단의 중책수행에 동분서주하다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935년 중부지방 순회목사의 직분을 사임했다.

1935년 제3회 총회에서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 된 것이 불씨가 되어 제3회 총회가 무효화 되고 이사회가 총회 집권 기관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교단의 내분이 일어났다. 젊은 목사들이 교단을 탈퇴하여 ‘하나님의교회’ 교단을 따로 창립하는 진통을 목격한 이상철은 그 해 10월에 이명직, 최석모, 곽재근 목사와 함께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사회는 그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겨 그 이듬해 사임서를 반려하고 그는 다시 이사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이상철은 두 살 된 아들을 잃는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193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37세의 짧은 일기로 소천을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선형에 모시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그의 산소를 찾을 길이 없다. 안타까움이 그지없다.<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