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鄭晉慶)의 성장과 신앙과정

정진경은 1921년 9월 14일 평안남도 안주군 한 작은 마을의 연일(延日) 정씨 희택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안주는 평안도 북서쪽의 농업지대였고, 그는 가문의 11대 종손으로 귀하게 성장했다. 그는 보통학교 3학년 어느 주일 오후, 마을 서삼리교회를 지나다 처음 들어보는 풍금소리와 찬송소리에 마음이 끌려 교회로 들어가자, 여교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그의 교회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주일마다 부모 몰래 교회에 다니다가 어느 날 발각되었다. 부친은 “얘야, 우리 가문은 전통에 따라 유교를 섬겨야지, 기독교는 절대로 안 된다”는 책망과 함께 종아리를 때렸다. 하지만 그는 주일이면 부모 몰래 교회에 갔다. 어느날 그는 교회에서 돌아오던 중 비를 흠뻑 맞은 채 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가 절뚝거리며 저녁 늦게 집에 도착하자, 그를 걱정하며 기다리던 부친이 뛰어나와 그를 얼른 업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진경아, 교회가 그렇게도 좋더냐?” “예.” “그러면 이제부터 원하는 데로 마음 놓고 다녀라. 내 허락하마.” 그래서 그는 주일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기도했다. 그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신의주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하자, 부친은 그의 학업을 위해 신의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 살던 그는 신의주의 번화한 모습에 놀랐다. 그리고 커다란 교회들이 여기 저기 많았다. “어떤 교회를 다닐까?” 그는 몇 교회를 찾아다니며 설교를 들어본 후, 동부성결교회를 선택했다. 담임 한성과 목사는 성경의 깊은 내용을 열심히 설교했으며, 또 신의주에서 새벽기도를 하는 유일한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새벽기도가 하고 싶어 교회에 갔다가 설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참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는 그 말씀을 붙잡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어려서 지은 죄들이 생각났고, 생각나는 대로 하나님께 회개했다. 그는 회개의 열매를 강조하는 설교말씀을 생각한 후, 당사자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고, 기차표를 반값으로 끊은 것이 생각나서 역장에게 용서의 편지와 함께 돈을 보냈다. 며칠 후, 역장에게서 답장과 함께 보낸 돈이 왔다. “정군의 정직한 마음에 경의를 표한다. 기독교가 참 좋은 종교인 줄 알았다. 보낸 돈은 처리할 수 없어 돌려보낸다”하는 내용이었다. 죄를 회개하고 나니,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그는 15살 때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1936년)에 부흥사 이성봉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이성봉 목사의 특유의 제스처와 찬송에 매료되었고, 특히 성결을 아주 쉽게 비유적으로 가르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나도 목사님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니야, 나는 장차 큰 사업가가 되어 가난한 우리 집을 일으켜야 돼”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주일학교 교사로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자, 교회 어른들이 “정군은 목사감이야. 신학교에 가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진경은 이성봉 목사가 “자네는 훌륭한 목사감이야. 헌신해야지”할 때에 “저는 사업가가 되어 장로로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성봉 목사는 초라한 교회를 3층의 벽돌교회로 건축했다. 동부교회는 신의주에서 제2장로교회(담임 한경직 목사) 다음가는 건물과 교세를 자랑했고 이성봉 목사는 성결교단의 부흥사로 임명되어 떠났다. 이어 김유연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설교와 심방으로 더 부흥했다. 그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시험에 합격하여 신의주 무진회사에 입사했다. 무진회사는 은행이었기 때문에 그는 종일 돈을 만졌고, 주판과 씨름하며 지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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